아이폰이 또 익숙한 경고를 보내온다. 저장 공간이 부족하니 당장 정리를 하라는 알림 창을 무시했더니 이번에는 메신저 앱이 열리기도 전에 종료된다. 어쩔 수 없이 빨간색 동그라미가 붙은 저장 공간 메뉴에 들어간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전체 저장 공간이 색색으로 채워진다. 노란색 바가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다. 노란색은 사진.
회사를 옮긴 지 만 2년이 지났고 이 핸드폰을 쓴 지도 2년이 넘었다. 출근한 지 일주일, 2019년의 어느 날 회사에서 하는 행사 사진을 찍는데 조용한 분위기에 울리는 핸드폰 셔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두 달 뒤, 급여가 들어오는 주에 인생 최초의 직구를 감행했다. 국내 리퍼 불가, 배대지 비용과 관세를 내면서 얻은 것은 256GB의 셔터 무음 설정이 되는 핸드폰이었다. (신용카드가 없던 때여서 이 와중에 현금박치기라는 점이 추가된다) 초조하게 태평양을 건너는 수화물의 위치를 새로 고침하며 기다리기를 일주일. 쓸 데 없이 귀여운 큐브 형태의 110v 어댑터와 함께 새 핸드폰이 도착했다.
셔터 소리가 나지 않는 새 핸드폰과 함께 많은 기록을 남겼다. 분위기를 깨지 않고 회사 행사 사진 찍기, 늘어져 있는 길고양이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며 재빨리 찍던 사진, 여행지에서 브이로그를 만들겠다고 찍던 조각 영상. 그 모든 기록들이 차곡차곡 쌓여 노란색 바를 채웠다. 쌓아두기만 했더니 끝도 없이 뻗어나간 노란색 바 때문에 핸드폰이 하루가 멀다 하고 앓는 소리를 한다. 더 이상 앓는 소리라 무시할 수 없을 때쯤 사진 앱을 켠다. 그리고 천천히 최근 사진부터 지우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용량은 2019년 이전의 사진이 차지하고 있음에도.
아무리 용량 부족에 시달려도 지울 생각을 하지 못하는 2019년 이전의 사진은 지금 핸드폰에도, 이전에 쓰던 핸드폰에도, 그 이전에 쓰던 핸드폰에도 똑같이 저장되어있다. 외장하드 두 개와 클라우드에도 저장되어 있다. 아직 대학생이던 때, 당시에 쓰던 핸드폰은 어느 날 갑자기 충전이 잘 되지 않았다. 충전 단자 쪽의 접촉 불량인 것 같았다. 금방 끝날 AS라고 생각해서 친구들과 저녁을 먹기로 한 날, 약속 시간보다 미리 나와 수리 센터에 들렀다. 그리고 갑자기 메인보드가 고장이 났고, 백업하지 않은 데이터들은 모두 사라졌다. 사진 찍기 싫어하는 강아지를 어르고 달래며 찍은 사진들, 강아지가 잠잘 때 몰래 다가가서 찍은 사진들이 그렇게 사라졌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와서 강남역에 있다는 데이터 복구 업체에 갔다. 꽤 비싼 값을 치렀으나 내게 돌아온 데이터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언제든 불러올 수 있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하얀 강아지의 조각들을 최대한 여기저기 숨겨놓는 수밖에.
핸드폰마다 사진을 옮겨두는 일은 그래야만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그만큼 자주 들여다보기 때문에도 필요했다. 출근길이나 주문한 커피를 기다릴 때, 퇴근길에 가족과 메신저를 할 때,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서. 심지어는 강아지가 옆에서 잘 때도 전에 찍어둔 강아지 사진을 뒤적거렸다. 2018년의 가을을 기점으로 새로운 사진이 추가되지 않지만 아직도 습관처럼 사진첩을 거슬러 올라간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자주 되돌아가는 연도가 있다는 것. 손가락 끝이 저절로 2016년을 향한다.
2016년의 나는 퇴사한 지 두 달 된 백수였고 그래서 많은 시간을 포포와 보낼 수 있었다. 이른 아침 출근과 등교를 서두르는 다른 가족들을 배웅하고 나서 포포는 스펀지 계단을 올라 내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오전 내내 한숨 자고 창 밖의 햇빛 때문에 방이 환해질 때쯤. 아직도 잠들어 있는 내 얼굴에 콧물을 튀기며 일어나라고 보채는 강아지 때문에 눈을 떠야 했다. 핸드폰 알람 대신 강아지 콧물이나 꿍얼대는 소리, 허공에 닿을 듯 말 듯 구부리고 긁어대는 앞발의 기척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날들이었다. 잠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이불에 파묻혀 늘어져 있고, 방금 씻은 네 발이 마르기도 전에 다시 산책을 조르고, 내가 외출할 때면 당연히 동행을 요구하던 (양손 가득 재활용 쓰레기를 버릴 때 조차도) 표정들이 2016년의 사진첩에 남아있다. 항상 할 말을 가득 담은 채 쳐다보던 두 눈이 거기에 있다.
가끔 연차와 나이 고민을 하다 보면 연차로 쌓이지 못한 그 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어떻게 보면 공백이라고 할 수 있을 시간. 그때 일을 일찍 시작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고개를 들다가도 내가 보낸 그 시간들을 떠올리면 그렇게 아쉽지 않다. 강아지에게 소홀했던 걸 모두 채우기라도 할 것처럼 꽤 충실하게 보낸 날들이었다. 다음 해에 나는 취직을 했고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강아지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2017년 봄, 처음 강아지의 불편한 몸짓을 발견했을 때 태평하게도 포포가 늙는구나 하는 감상 어린 생각을 했다. 이제 포포도 관리를 해줘야 하는 나이가 되었구나 하고 섣불리 오해하지 않았어야 했다. 발견했으니 신경 쓰면 될 것이라 안심하는 게 아니었다. 강아지의 시간은 인간보다 빠르게 흘러간다고, 강아지 나이에 숫자 몇을 곱해야 사람의 나이로 환산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약해지기 시작한 강아지의 시간은 그보다 더 빨리 흐른다. 심지어 당시에는 잘 몰랐다. 곁에서 계속 약해지는 걸 지켜보는데도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해 여름에 남긴 조각 메모는 이렇다. ‘포포가 앞발로 바닥을 디뎌보려는 다급한 발톱 소리가 들린다. 서둘러 가보면 곧게 서 있는 목과 머리만큼 따라주지 않는 네 다리 때문에 가슴과 배가 바닥에 붙어있다. 스스로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다리가 당황스러운지 놀라서 살펴보는 나와 마찬가지로 포포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 볼뿐이다. 일으키려 다가가면 미리 긴장하고 경계하는 게 느껴진다. 늙은 개가 느닷없이 포기해야 할 게 늘고 있다. 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처럼 개도 갑작스런 상실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지. 눈을 마주치고 행동을 살펴볼 수 있는 거리에서는 강아지가 내색하지 않으려 하니 반대편 방에서 작은 발톱 소리가 공허하게 울리지는 않는지 계속 귀 기울일 뿐이다. 저 개가 오늘 잠들 수는 있을까. 그리고 나는.’
2017년부터의 사진을 훑어볼 때면 강아지가 늙고 약해지는 속도에 놀란다. 사진을 옆으로 넘길수록 휙휙 늙은 강아지의 모습이 지나간다. 2018년의 사진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늙고 아픈 강아지 곁에서는 사진 찍을 틈이 없었다. 단지 계속 지켜볼 뿐.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순간에도 강아지는 보지 못한 곳에서 빠르게 약해져 갔다. 약해지는 강아지의 상태에 대처하기 급급해서 정작 그때는 느끼지 못했다. 이제 와서 그때의 사진을 돌려보면 사진 속 포포가 얼마나 빠르게 작아졌는지 실감한다. 한 장씩 넘기면서 사진 속 강아지의 눈을 들여다본다. 항상 해달라는 게 많았던 두 눈이 점점 태연을 가장해간다. 변화에 적응한 듯 익숙해 보이기도 무심해 보이기도 어쩌면 그저 견디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때도 지금도 강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고 그 앞에서 내가 겨우 해냈던 보잘것없는 돌봄만 떠오른다. 지난 무력함이 떠올라 눈 앞이 흐려질 때면 부지런히 스크롤을 올려 다시 2016년으로 되돌아 간다. 자꾸 찾아와서 사소한 무언가를 해달라고 보채던 강아지와 기꺼이 시간을 내어줄 수 있었던 그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