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luffy moment Jun 16. 2021

강아지의 기척을 기다리는 하루

재택근무 첫날의 소감

두 번째 재택근무를 앞둔 저녁. 퇴근하고 돌아와 그대로 누워버리는 대신 내일 업무를 위해 책상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출근은 하지만 출근길의 고단함이 없을 내일 아침을 생각하니 여유를 부리게 된다. 6개월 전 처음 재택근무를 했을 때 사둔 노트북 받침대와 기계식 키보드를 꺼냈다. 인생 첫 재택근무의 풍경도 함께. 재택근무 첫날, 책상에 앉은 지 반나절이 지나자 몸 곳곳에서 통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쩌다 한두 시간 앉아있을 때는 몰랐던 불편이었다. 앉은 채 살펴보니 책상은 낮고 의자는 높고, 노트북 모니터를 내려다보느라 목은 점점 앞으로 나왔다. 그날 바로 재택근무 데스크 셋업을 위한 장바구니를 채웠다.


바뀐 환경에 혹사당한 어깨를 주무르며 책상에서 침대로 퇴근한 저녁. 가만히 누워서 퇴근한 기분을 만끽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이렇게 방해 없이 집중해 본 적이 있었던가. 우리 집은 식구 수가 많아서 늘 복작거리는 분위기였고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집 밖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집을 덜 복작거리게 하는 쪽으로 생활 패턴이 바뀌었다. 가족이 저마다의 일로 외출한 집에서 보내는 평일의 풍경은 기억 속 집에서의 하루와 많이 달랐다.


팬데믹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재택근무의 첫 소감을 생각하다 보니, 문득 초등학생이던 때 남몰래 품었던 장래희망에 재택근무가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초등학교 사회 시간에 정보화 시대니 원격 수업이니 하는 것과 더불어 미래에는 재택근무를 하게 되는 직종이 있을 거라고 하는 내용을 배웠던 것 같다. 회사를 안 가고 집에서 일하는 어른도 있을 수 있구나. 그때 속으로 나는 커서 재택근무가 가능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떤 일을 할지는 생각하지 않고 재택근무가 가능한 일이 무엇이 있을지를 골몰했었다. 그리고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한 평생을 강아지를 키우자고 엄마 아빠를 졸랐던 내가 12살이 되던 해, 드디어 강아지 동생이 생겼다. 우리 집에 온 하얀 강아지는 엄마가 아침에 나를 깨우면 쫓아와서 깨우지 말라고 짗어댔다. (목소리가 우렁차서 엄마보다 더 큰 소리였지만) 강아지를 마냥 귀엽게만 생각하고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전혀 생각이 없었던 대책 없는 12살의 나는 그냥 강아지랑 헤어져서 집 밖으로 나가는 게 싫었다. 사실 강아지의 어떤 면이 내 장래 희망을 재택근무로 정하게 만든 건지 구체적으로 생각나지는 않는다. 강아지 때문에 재택근무를 하고 싶었던 것까지만 기억날 뿐. 강아지를 위해서 기꺼이 내 삶과 진로를 바칠 수 있을 것 처럼 굴던 해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집에서는 온전한 내 시간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새벽에 깨어있는 습관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졸음 말고는 나를 부르는 타인이 없는 시간. 가끔 자다 일어나서 물을 마시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방마다 한 바퀴 순찰하는 강아지가 찾아올 뿐. 어깨와 목이 아프고 조용한 집이 낯설었던 재택근무의 첫날. 책상에 앉아있는데 강아지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에 놀랐다. 방문을 닫아두더라도 곧 문을 열어달라고 발톱으로 긁는 소리가 들리고, 문을 열어주면 들어와서 밖을 보겠다고 창문을 열어달라고 하고, 창문을 열어주면 바깥공기를 맡다가 산책을 가자고 발을 구르고, 혹은 침대 위로 올라가 누울 자리를 찾느라 이불을 뱅뱅 돌고, 앞발로 둥지를 만들다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이불을 어떻게 해달라는 듯 가만히 서서 쳐다보고 있는 강아지의 기척.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집 안에서 나는 습관처럼 방 이곳저곳을 쳐다봤다. 메일 하나를 보내고 숨 고르다 닫힌 문을 한 번, 작성 중인 문서의 다음 말을 고르다가 앉아 있는 발 밑을 한 번, 기지개를 켜다가 뒤 편의 침대를 한 번. 왼쪽에서 떠서 오른쪽으로 지는 창밖의 해를 곁눈질하면서 자연스레 오늘 날씨가 산책하기 좋은지를 가늠해보았다. 강아지와 처음 한 집에 살게 됐던 때의 나는 이렇게 하루의 조금씩을 떼어서 강아지에게 주고 싶었던 걸까. 습관처럼 몸에 밴 기다림을 멈추기 위해서는 닫힌 문 너머에 이 조용한 집 어딘가에 하얀 강아지가 더 이상 없다는 걸 떠올려야만 했다. 아직도 익숙해져야 할 일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2016년을 맴도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