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남해 아니고, 남해 바다도 아닌, '남해군'입니다.
남해간다고? 남해 어디?
올 초,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경상남도 남해군. 내가 남해로 여행을 간다 했더니 모두가 보인 반응이 똑같았다. 남쪽에 바다를 끼고 있는 모든 지명을 묶어서 남해라고들 많이 부르니, 남해군은 온전한 자신의 이름을 잃은 셈이다. 남해 여행을 결심하게 된 건 순전히 '가천 다랭이마을'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예전부터 계단식 논밭을 좋아하던 터라 발리 우붓 여행 때도 열심히 찾아다녔다. 같이 간 친구가 질려할 정도로 말이다.
원래는 스페인 남부지방 여행을 계획 중이었다.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따스한 햇빛을 맞으며 지중해 바다를 실컷 보고 오고 싶었다. 하지만 삶은 참 내 뜻대로 안 되고 늘 변수가 생긴다. 갑자기 길게 여행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눈물을 머금고 거대한 수수료와 함께 비행기표를 환불했다. 그래도 어디든 꼭 떠나고 싶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여행하는 4일 동안 내가 가고 싶은 곳은 '가천 다랭이마을'과 '보리암' 그 두 가지가 다였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시간을 많이 보낼 숙소 선정이 중요했다. 잔잔한 조용함이 깃든 곳에 가고 싶었다. 혼자 여행인 만큼 고요함 속에서 충분한 고독이 필요했다. 나는 이미 혼여러들 사이에서 유명한 <생각의 계절>을 택했다. 생각의 계절은 2인 이상의 동반 여행자는 허용하지 않는, 다분히 1인 여행자를 배려한 게스트 하우스이다. 남해에서도 제일가는 조용한 동네인 평산 2리에 위치해 있다. 나는 여행의 대부분을 이곳 평산 2리에서 보냈고, 아직도 떠올리면 가슴이 시큰한 그리운 곳이 되어버렸다.
내 남해 여행의 8할이 이 숙소다. 그래서 길게 얘기할 수밖에 없다. 생각의 계절을 찾아가는 법은 홈페이지에 상세하게 나와있으니 참고하면 된다. 남해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평산 2리 정류장에 내리면 바로 앞에 보이는 하얀 집이다. 부부가 운영하고 계신데,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남편인 사장님밖에 보지 못했다. 올 초만 해도 미세먼지 경보가 한참 울릴 때라 많은 여행자들이 예약을 줄줄이 취소했다. 그래서 게스트하우스를 거의 전세 내다시피 혼자 썼고, 사장님이 유일한 내 말동무였다. 이곳에 묵으면 매일 음료 한 잔씩 무료로 제공되는데, 그때마다 음료를 핑계로 탁 트인 카페 통유리창 앞에 앉아 실컷 바다를 보았다. 평산 2리에는 마땅한 슈퍼나 식당이 없어서 이 게스트하우스 1층 카페가 매우 소중하다. 이름처럼 멍하니 생각에 잠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아, 그리고 방 종류가 여러 개인데 혼자 여행을 온다면 꼭 싱글룸에 묵길 바란다. 침대 바로 옆 창가에서 아침에는 새소리가 들려오고, 밤에는 반짝이는 밤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평산 2리를 사랑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 '남해 바래길'이다. '바래'는 남해 사람들의 토속어로, 옛날 남해 어머니들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갯벌에 해산물을 채취하러 다니던 길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평산 2리는 가천 다랭이마을까지 이어지는 남해바래길 제1코스의 시작점이다. 그리고 이 바래길은 4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나의 귀한 산책길이 돼주었다.
원래는 걷는 걸 너무 좋아하는 뚜벅이 여행자라, 이 바래길을 통해 가천 다랭이마을로 가려고 했다. 아침에 여행을 나서기 위해 내려오면, 1층 카페에 계시는 사장님이 "오늘은 어디를 여행하시나요?"라고 물어봐주신다. 그 이유는 그날 내 여행지마다 알맞은 정보와 조언을 얹어주시기 위해서다. 여행 첫날 나는 해맑게 웃으며 "바래길 코스로 다랭이마을까지 가려고요."라고 말했다. 그때 동그래지시던 사장님 눈을 잊지 못한다. 사실 해안길을 따라 나있는 코스라 내가 만만하게 봤던 거지, 산악회 분들이나 트래킹 모임에서 다 같이 중무장을 하고 떠나 반나절 넘게 내리 걷는 험한 길이란다. 사장님의 결사반대로 결국 나는 버스를 타고 다랭이마을까지 이동하기로 했고, 그건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남해 바래길 제1코스는 '평산항 - 유구 진달래 군락지 - 사촌해수욕장 - 선구 몽돌해안 - 향촌 조약돌 해안 - 향촌 전망대 - 다랭이 지겟길 - 가천 다랭이마을 - 옛 가천 초교'까지 이어진다. 내가 매일 산책하던 길은 평산항에서 유구 진달래 군락지 사이에 있는 길이다. 사실 가다가 중간에 계속 돌아옴을 반복해서 아마 평산 2리 옆 마을 정도까지만 왔다 갔다 했던 것 같다. 남해는 눈 두는 어느 곳이라도 소박한 정겨움과 단아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 산책길이 가장 아름다웠던 건 아마 밭일하시는 어머님들과 어우러지는 일상의 조용함 때문이었을 거다. 바람소리가 크게 들릴만큼 고요하고 잔잔하다. 그래서 더 눈 앞에 보이는 모든 풍경에 집중할 수 있다. 산책하는 내내 그 길에 이방인은 나뿐이라 온전히 그곳을 누릴 수 있었다.
남해군, 그곳에서도 평산 2리는 정말이지 나만 알고 싶은 곳이다. 나는 이곳에서 고요함이 때로는 세상 어떤 위로보다 가장 따뜻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뿐만 아니라 남해에서 만난 모든 분들이 다 정겹고 따뜻했다. 여행 마지막 날, 친구가 이곳 남해로 내려왔다. 영상통화로 내가 보여주던 바다가 자신을 불렀다더라. 터미널로 친구를 마중 나가 여행 중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군내 버스에 올랐다. 군내 버스는 벨이 따로 없어서 여행자는 버스 맨 앞 줄에 앉아 자신이 내릴 곳을 미리 기사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현지 분들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에 "내려요~"라고 외치시더라. 그날도 어김없이 버스 맨 앞줄에 앉았는데 기사님께서 "오늘은 친구랑 같이여?"라며 인사하셨다. 남해군이 워낙 젊은 사람이 없다 보니 혼자 돌아다니는 내가 눈에 띄었나 보다. 작은 동네라 이방인은 금방 알아챌 만큼 서로 두터운 곳이다. 버스 기사님들은 4일밖에 머물지 않던 나를 기억하시고, 목적지에 잘 내릴 수 있도록 항상 배려해주셨다. 짧은 시간이지만 내가 이곳에 잠시나마 스며든 것 같아 코 끝이 찡해지던 순간이다.
가천 다랭이마을은 꼭 유채꽃이 활짝 피는 3-4월 중에 가면 좋겠다. 바람이 약간 쌀쌀하긴 하지만, 볕 잘 드는 카페테라스에 앉아 노란 물결을 바라보면 그저 행복해진다. 남해 보리암은 올라가는 길이 평탄하지 않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야 한다. 품고 있는 역사만큼이나 작지만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보리암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있는 금산산장은 꼭 들려야 한다. 산내에서 취사가 금지되어 냉동식품을 데워서 판매하지만, 그 풍경을 바라보며 먹는 음식은 무엇이든 다 꿀맛이다. 현금결제만 가능하니 유의하고, 메뉴 중에서는 메밀전병만 피하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