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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COMFY Jan 14. 2023

겨울숙제

오십 미터

대학 새내기 시절 나한테서는 3가지 냄새가 났다. 보라색 통에 든 섬유유연제 냄새, 섬유유연제를 넣었음에도 건조를 잘못해서 나는 물 냄새 그리고 퀴퀴한 냄새를 없애보고자 뿌렸던 페브리즈 냄새. 당시 나는 좋은 향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불쾌한 향이 어떤 것인지는 너무나 잘 알았다. 그 탓에 나한테서 그런 향이 나진 않을지, 내가 불쾌한 사람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되어 항상 티셔츠를 코에 갖다 대곤 했다. 킁킁, 오늘 빨래는 잘 말랐네 라면서.

그러던 12월의 어느 날. 그날은 난데없는 폭설로 거리 곳곳에 수북하게 눈이 쌓였던 날로 기억난다. 그래서 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언덕 위의 캠퍼스가 한동안 들떠있었다. 애틋한 긴장감이 초겨울 기운과 뒤섞여 교정을 가득 메웠다. 곧 크리스마스였다.

사실 12월이 됐을 때부터 나는 바로 A를 생각했다. A도 그랬을 거라 짐작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은색 포장지에 들어있는 향수를 주진 않았을 테니까. 한 손으로는 향수를 받으며, 다른 한 손에는 A를 주려고 산 꽃다발을 바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내가 받은 향수에 비하면 꽃은 너무나 보잘것없어 보였다. 그때 나는 A가 차라리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고맙지만 받을 수 없다'고 하길 바랐다. 그러면 나도 향수로 다시 사줄 텐 데라면서. 하지만 A는 고맙다면서 웃어주었다. 나는 그저 미안함에 따라 웃을 뿐이었다.

이후로 나에게서 나는 냄새가 세 가지에서 네 가지로 늘었다. 고작 향이 하나 늘었을 뿐이지만, 동시에 모든 게 달라졌다. 75m짜리 은색 병 안부터 향수를 뿌리고 다닌 모든 곳에 A가 있었기 때문이다. 같이 갔던 대학로 떡볶이 집에도, 매일 가던 극장에도 A가 있었다. 그해 겨울은 그래서 좋았다.

하루는 A에게 왜 향수를 선물했냐고 물었다.
"원래 향수를 좋아해서 예전부터 모았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탈취제가 세상의 모든 향인 줄 알던 나에 비하면 왠지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A는 몇 방울로 새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향수가 좋다고 했다. 그리고 나도 그 기분을 느껴보길 바란다면서 내 손목에 잔향을 맡았다.
그런 A를 좋아했다. 계절마다, 날씨마다 다른 향을 냈던 A를, "이 향은 너와 어울릴 것 같아." 라며 향수를 선물해 주는 A를 나는 좋아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A와는 1년 반 만에 헤어졌다. A가 나에게 선물해 주었던 달콤한 향은 카모플라쥬의 홀아비 냄새에 밀렸다. 국방의 의무가 무엇이라고.. 네 번째 휴가를 나갔을 때였을 거다. 이미 마음을 다잡고 간 터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준비했던 말들, 상처되는 한숨들을 모두 주고받고 난 후, 나는 오십 미터도 못 가서 A를 생각했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A를 생각했다.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축복은 나에겐 없었다. 그땐 죽을 만큼 힘들어서 하루하루를 속절없이 버티며 지냈었는데. 국방의 의무가 무엇이라고 다행히도 시간은 잘도 흘러가게 해주었다. 시간이 지나서 A로 가득 차던 향수병이 가벼워질수록 나의 마음도 열어졌다. 거기에 지독했던 화생방 냄새가, 메케한 화약 냄새가 이별에 가속도를 붙여주었다.

그리고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강산이 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무던히도 변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A를 잊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매년 겨울마다 검은 머리에 새치 보이듯 문득 생각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움의 크기는 시간의 흐름과 비례했다. A에 대한 그리움이 쌓일수록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잘 지내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그리움에 마음이 아팠지만,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쌓이게 두었다. 비워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었고,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쌓인 그리움은 감정이 무뎌지고, 새로운 향수를 뿌릴 때마다 하나씩 덜어냈다. 모두 다 천천히 지나간 시간 덕분이었다.


작년 겨울에는 꽃을 들고 웃고 있던 A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재작년에는 만나면 냄새가 좋다며 내 옷에 얼굴을 문던 A를 보내주었다. 올해 겨울에는 과연 어떤 그리움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매 겨울 이렇게 숙제처럼 A를 보내고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 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오십 미터 _ 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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