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을 입고 자리에 앉자마자 뒤에서 들려온 슬픈 이별 고백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별 소식을 전해 들은 곳이 근 5년 동안 월례행사처럼 매달 찾던 미용실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하여, 가벼운 머리 상태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이별을 통보받은 것이다.
당혹감에 갈 곳을 잃은 내 눈동자로 앞에 비친 거울을 힘겹게 더듬었다. 거울 속에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가는 디자이너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건강상의 문제로 더 이상 이 일을 할 수 없게 됐으며, 갑작스럽지만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다고 했다.
순식간에 나는 몇 안 되는 단골 가게 중 하나를 잃어버린 손님이 됐다. 하지만 그 황망함이 가게 주인만 하겠냐 싶었다. 밥 먹고 지금까지 해온 일이라고는 가위 질 뿐이었는데, 이제 앞으로 손에 무엇을 쥐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는 그의 상실감을 나는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못 보고 가면 어쩌나 했는데 그래도 마지막으로 얼굴 보고 인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선생님은 가위를 들었다.
사각, 사각
가위 소리에 이어서 잔상처럼 바닥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들이 선생님의 눈물 같다는 지극히 F적인 생각을 했다. 사랑하는 연인도 아니고, 부모, 형제 하물며 친구 사이도 아닌, 사장과 손님이 이렇게 애틋할 일인가 싶었다.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머리를 말릴 때였다. 선생님은 시끄러운 헤어드라이어 소리 뒤편에서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손님 머리는 직모고, 성격이 강해요. 파마하셔야 하지만, 하신 직후에는 약산성 샴푸로 머리를 감아주세요. 그래야 두피에 자극이 덜 가거든요.”
“손님 이마는 M자가 진행되고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M자거든요. 그러니까 양쪽 앞머리 너무 짧게 자르지 마세요. 짧으면 빈 부분이 잘 보이거든요. 다른 미용실 가도 이 부분은 먼저 말씀해 주세요.”
“머리 말릴 때 열을 가하고, 3초 정도 기다려 주세요. 자연스럽게만 해줘도 스타일이 나거든요.”
엄마도 알지 못하는 내 머리 비밀을 말하는 그 모습은 마치 영화[엽기적인 그녀]의 마지막 장면처럼 애틋했다. 연인을 떠나보내듯 절절하게 설명하는 모습이 괜스레 슬퍼져 평생 안 볼 사람처럼 왜 그러시냐며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30여 년을 살면서 수많은 경험을 하고, 다양한 일들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별만큼은 정말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니 헤어짐에서 오는 슬픔과 충격은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더 심해지기만 한다. 왜 그런고 생각해 보니 나이 먹고 겪는 이별은 예상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매년 연말에 이별이 있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겨울방학 시작과 동시에 정들었던 친구들과 선생님, 사물함 그리고 책상 위 낙서들과도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다. 처음에는 분명 힘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옆자리에서 웃고 떠들던 친구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만 꼬박 몇 달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머리에 피가 마르고 이별의 상처가 아물고 덧나기를 반복하면서, 그 자리에 매일 남아있는 사람들이 생겼다. 스친 옷깃이 쌓이고 쌓여 ‘인연’ 말고는 다른 호칭이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날 떠나지 않을 것이고, 나도 떠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 줄 것이고, 이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해도 좋겠다고 느끼게 해주는 사람으로 주위를 채워나갔다.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옆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곱씹을 줄 아는 나이가 되어갔다.
‘인연’이란 발판은 너무나 견고하고, 단단해서 어떤 모진 시간의 풍파를 보내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는다. 어제 만난 듯 반갑고, 갑작스러운 연락도 부담스럽지 않다. 하지만 변하지 않을 거란 믿음 때문에 오히려 갑작스러운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와중에 뒤통수를 맞았으니까, 그 고통이 몇 배는 크게 다가온다. 나이 먹고 겪는 이별은 그래서 힘들다. 켜켜이 쌓인 추억이 한 번에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옷깃에 묻은 머리카락을 털어주는 선생님의 손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5년 동안 이렇게 무수히 많은 인연이 쌓였겠구나 싶으니 이 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한 시간의 이발이 이렇게 애틋했던 이유 또한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떠나보낼 때가 되어서야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운명의 장난을 속으로 욕하며 마지막 결제를 했다.
문을 열고 나가려다 뒤돌아 두 손 꼭 잡고 악수를 청했다. 지금까지 감사했다는 인사 대신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말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