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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리고 살리고 Mar 18. 2019

“해마다 당신한테 새 신발을 지어줄 수만 있다면"

『인생』(위화, 푸른 숲, 2018)

“해마다 당신한테 새 신발을 지어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됐어요.”

                                                                                                                                                                           

나이가 들수록  반드시 좋은 게 좋다고, 나쁜 게 나쁘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진다. 한 친구가 몇 년 전 암에 걸렸다. 그는 성격이 까칠했다. 병을 얻고도 타인에게 그랬던 것과 같이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했다. 그 결과 건강을 되찾고 아름다워졌다. 누구에게나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까칠한 성격이 자신을 살린 것이다. 그 친구를 통해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 있다. 중국의 현대 소설 작가 위화의 『인생』(푸른 숲, 2018)이다.


소설 『인생』은 중국 혁명과 대약진, 문화 대혁명에 이르기까지 중국 현대사의 질곡을 살아온 ‘푸구이 노인’의 인생 이야기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한 후 가난한 농민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한다. “나는 말일세.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거라네. 젊었을 때는 조상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살았고, 그 뒤로는 점점 볼품 없어졌지. 나는 그런 삶이 오히려 괜찮았다고 생각하네.”(pp.278~279)


도무지 괜찮을 수 없는 인생이다. 도박으로 전 재산을 잃고 내전의 전쟁터에 끌려가 죽을 뻔했다. 가난에 허덕였고 굶주렸다. 가난 속에서 가족을 통해 사랑과 기쁨을 느끼려 했지만 그마저도 어려웠다. 가족들이 기다려주지 않았다. 사고와 병으로 하나씩 목숨을 잃은 것이다. 결국 푸구이 홀로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구이는 그러한 삶이 괜찮았다고 답한다.


“이 생각 저 생각하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 치러주고, 내 손으로 직접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p.278) 짧은 생을 산 이들이 불쌍하다 여겼는데, 어느 순간 이 세상 의지할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은 ‘푸구이’가 가장 가련해졌다. 인생은 이렇듯 어느 한 가지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을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사람은 사는 동안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p.9) 사람은 중요한 것을 잘 놓치는 존재가 아니던가.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야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은 살아가는 이후의 문제다. 작가는 우리가 잊고 있는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운명을 믿고 의지한다. 운명에 대한 믿음은 때때로 우리의 삶에 위안이 되어준다. 푸구이는 가족들의 마지막을 자신이 마무리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명은 타고난 운명이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운명에 대한 믿음은 개인적 선택이다. 푸구이는 남은 생을 살아가기 위해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살아가는 것’을 위해 사는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 작가는 푸구이의 부인 자전을 통해 말한다. 푸구이가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있다 가까스로 집에 돌아온다. 자전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한다. 살아남았으니 훗날 반드시 복이 있을 거라는 말도 덧붙인다. 이때 자전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복 같은 거 바라지 않아요. 해마다 당신한테 새 신발을 지어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됐어요.”(p.111)


죽은 이는 산 사람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 그 기억은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하기도 한다. 이야기로 전해지는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느낌보다 생각이 앞서지는 않았을까. 우리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종일 생각과 계산을 하며 산다. 하지만 가끔은 생각은 멈추고 순간의 느낌을 놓치지 않는 것이 ‘살아가는 것을 위한 삶’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푸구이의 인생 이야기처럼 말이다.


​아홉 살 딸아이가 ‘푸구이’의 삶이 나를 통과하는 모습을 시로 표현했다. “엄마의 인생은 울음바다다.”


〈엄마 플러스 인생〉


별것 아닌 일로 울었다.

엄마는 인생을 보다 울었다.

엄마는 간식을 대충 차려 놓고는

인생을 보며 또 울었다.

엄마의 인생은 울음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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