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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opal May 25. 2020

예술로 철학을 전달하다.

작가주의와 철학

작가주의예술로 철학을 전달하다.


 개인의 철학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예술가들에게는 예술이 가장 쉽고 흥미로운 소재겠지만, 그것을 전달받는 입장에선 간혹 난처할 때가 있다. 흩뿌려진 쾌락의 산물을 조각조각 모아 해석하려 보면 애초에 그 시도조차 하기 싫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한 때는 예술 영화를 좋아했다. 예술 영화는 어딘가 난해하고, 쉽게 해석할 수 없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어 굳이 해석하려고 하지 않아도 영화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위 ‘작가주의’ 영화라 불리는 것들을 일부러 찾아보곤 했다. 


 작가주의. 1950년대 프랑스 비평계에서 처음 등장한 이 개념은, 영화감독을 중심으로 보고 작가(영화감독)의 철학이 영화라는 창작물에 있어 얼마나 잘 반영되었고 발전했는지를 기준점으로 두는 개념이다. 1960년대에는 영미권에도 이 개념이 수출되어 미국의 유명 영화 비평가 앤드루 새리스(Andrew Sarris)는 아예 작가 이론(Auteur Theory)을 만들게 된다. 당시 유명 감독들에게 등급까지 매겨가며 평가하곤 했지만, 할리우드 평론가들에게 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생전 ‘작가주의’란 단어를 많이 알렸던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Truffaut, 1932~1984)


 나는 평소 그리스 출신 감독 요로고스 란티모스(Yorgos Lanthimos)를 좋아한다. 그의 작품을 거의 다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최근 그의 초기작인 송곳니(Dogtooth, 2009)를 보게 되었는데, 영화는 극단적인 호불호가 많이 갈렸지만 나는 감독에 대한 팬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괴한 연출, 극단적인 장면 설정 등이 나열되자 점점 더 그런 호감은 흐트러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나쁜 영화라고 할 수 없지만, 더 랍스터(The Lobster, 2015), 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 2017) 여왕의 여자(The Favourite, 2018)에서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었던 감독의 철학을 상업이나 공감이란 가치를 뺀 날 것의 알맹이로 본 느낌이었다. 

 그리곤 의문을 갖게 되었다. 개인의 철학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요로고스 란티모스(Yorgos Lanthimos)


 결국, 전달이다. 철학이든, 공감이든, 메시지든 무언가 영화, 미술, 글, 음악 등으로 전달하려는 행위이다. 전달되지 않는 일방적인 언어는 싸지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싸지름은 더 이상 ‘예술’이라는 단어의 포장으로 보존될 수 없다. 

 작가주의 개념에 기반한 비평도 필요한 구성이라 보고, 당연히 포함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가주의 영화’하면 단순히 난해한 자극만을 뿌려 놓는 장면의 나열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언제부터 예술이 그렇게 난해한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했을까?


 철학. 사상의 전달은 언제나 좋다. 개인의 사념을 알게 되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다. 그러나 극단적이거나 때론 무조건적인 자극만을 통한다면 자극 그 자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자극은 때때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훌륭한 구성이 되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분명한 이유와 통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 또한 예술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또 다른 작가주의에 함몰된 비평에 지나지 않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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