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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Dec 12. 2021

나의 두 번째 최남단, 가파도

색공방과 낭꾸러기

이번 제주 여행은 거의 내내 가파도에 있었다. 국토 최남단이라는 마라도 위에 위치한 작은  가파도는 최남단이라는 타이틀을 가져가지 못해 상대적으로 관광객이 적다.


청보리 시즌인 봄철 외에는 이 섬을 찾는 관광객들이 연간 6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오전 10시부터 배가 운항되는데 마지막 배가 끝나는 4시 이후로는 상점들이 다 문을 닫고 웬만해선 거리에서 사람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실거주 인구수 150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섬, 그마저도 대부분이 준고령층이라 배가 떠나면 약속이나 하듯 조개처럼 대문을 걸어 잠그는 이 섬에서의 여름은 나른하게 흘러갔다.

 



6월 말, 낚시꾼이 아닌 외부인은 나 혼자였다. 아무도 없는 섬을 한 바퀴 쭉 걷다 노을에 물든 바다를 보고서 하루가 끝났다. 다음날 밤에는 항구 쪽에 위치한 무인 카페에서 밤바다를 배경으로 책을 읽었다.


처음엔 세상과의 단절이 좋았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질수록 무료해지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심심할 정도로 정말이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내가 가파도 색공방 이모님, 나무 공방 낭꾸러기를 만난 건 마치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미리 준비해온 우산처럼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6년 전부터 이 섬에 정착한 이모님은 천연 염색 소품 공방을 운영하고 계셨다. 천연 염색 의류부터 시작해 도자기 공예, 회화까지 여러 상품들을 손수 만들어서 판매했는데 검색 포털에 '색 공방 가파도'라고 치면 이모님 가게가 바로 나왔다. 이모님 스스로도 "나 마케팅에 소질 있어"라고 말할 정도로 손재주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잘 끌어당기는 분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만난 지 이틀 차엔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지나온 삶에 대해 이야기할 정도로 친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색이 예뻐서 들어가자마자 사버렸던 이모님의 천연 염색 모자를 매만지며 나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바다 쓰레기인 감태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떠밀려온 감태가 인근 해안 조경을 해치니 그걸 염색 재료로 활용해봤는데 정말 좋더라. 아무도 돌보지 않고 버려진 자원인데 염색하면 색이 정말 예쁘게 나온다고.


"EBS 한국기행에 가파도 감태 염색 전문가도 출현했는데 나중에 한번 찾아봐봐."  


이윽고 천연 염색 공정을 지금보다 더 편하게 하기 위해서 정부 지원사업 계획서를 쓰고 있다 얘기하셨다.  


"감물이나 쪽 같이 천연염색으로 옷 만드는 건 힘든 일이거든. 빨고 담그고 널고 다리고 이 나이에 혼자서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렇게 해도 몇 벌 나오지도 않아. 그래서 지원해보려고."


올해 60세인 이모님이 내 앞에서 콧잔등까지 흘러내리는 안경을 끌어올리며 천연 염색 사업을 설명하는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려는 모습이 마치 60세의  꿈많은 어린 왕자를 보는 것 같달까.(실제로 이모님 공방에는 어린 왕자 그림이 곳곳에 걸려있었다) 이모님에 대해 더 알게 될수록 나는 뭐에 홀린듯 이모님의 사업계획서 작성을 도와드리겠다 말씀 드렸고 이후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서류 마감일까지 일을 도와드리게 됐다.


이모님이 직접 그린 어린왕자



색 공방 외에도 나무 공방 낭꾸러기 또한 매우 인상적인 공간이었다. 낭꾸러기는 카페와 공방을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공방 앞에 널빤지나 여상한 나무조각들이 쌓여있어서 처음 보는 이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쇼룸에서 표면이 유난히 부드러워 보이는 나무 트레이를 둘러 보고 있을 때였다. 사장님이 뒤에서 말했다.


"예쁘죠. 바다에서 떠내려온 유목으로 만든 거에요."


오고 나가기 힘든 섬이라 일반 나무를 구하기 어렵다고 말을 이었다.


"나무가 바닷물에 절여졌는데 괜찮나요?"


"그럼요. 제가 직접 주워서 말리고 깎고 다듬었어요."


그리고선 전시된 유목 트레이들을 하나 하나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셨다. 가진 모양이 각자 달라서 최대한 이 아이들 모습을 그대로 가져가려고 했다고 덧붙이셨다. 결국 나는 그날 그 트레이를 샀다.


"음각 새겨드릴까요? 글자 넣어드릴 수 있는데"


"Classicus라고 적어주세요. Classic(고전) 의 라틴어원인데 누군가의 헌신을 기억하다 라는 뜻이에요"


사장님은 멋진 뜻이라며 미소지었는데 괜히 또 궁금해졌다.


"원래 목공 쪽을 전공하신건가요?"


"아뇨. 원래는 서울에 살았는데 아이 학교 문제로 제주로 내려오고부터 목수 일을 배웠어요."


"트레이, 컵받침, 인센스. 여기 있는 것 하나하나 너무 예쁜데요?"


"누가 가르쳐준 건 아니고 유튜브 보고 독학했어요. 처음에는 서툴렀는데 오래 자주 하다보니 그래도 좀 편해졌죠."


유목을  다루는 건 일반 나무보다 훨씬 더 까다롭다고 말하는 사장님 손을 가만히 쳐다봤다. 저 까맣고 투박한 손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배어있을까.


그날 내가 산 유목 트레이는 바로 받지 못했다. 표면이 거칠지 않게끔 기름칠을 많이 해서 택배로 보내주겠다 하셨다. 이 아이가 좋은 분께 가 쓰임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들었을땐 기분이 묘했다.


머리 위에는 천연 염색 모를 쓰고, 손에는 나무 공방 명함을 들고 난뒤 밖을 나섰다. 눈 앞은 바다였고 어디를 보나 탁 트여 있었다. 세상에 쓸모 없는 건 없구나. 해일과 풍랑에 떠밀려온 감태도, 나무 조각 하나하나도.


그 후 나는 섬에 들어올 때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섬을 나갈 수 있었다.  


유목으로 만든 트레이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번 아웃이 왔다거나, 일상에 지쳐 아무도 없는 섬으로 도망치고 싶다면 나는 자신 있게 가파도를 추천하고 싶다. 운이 좋다면 나처럼 쓰임이 다한 것들을 되살리며 다시 열심히 살아볼 계기를 만들어줄 인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소음이 차단되어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고, 바삐 움직이지 않아도 되니 인생에 있어 뭐가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청보리 시즌의 가파도를 기억하고 그리워하겠지만 나는 청보리 시즌을 비켜나간 가파도에서 다시, 가파도에 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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