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이자 너의 외할아버지가 쓴 일기였지. 엄마가 태어나기 전, 외할머니 뱃속에 있었을 때
그리고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신생아였던, 그 시간동안 나의 아버지께서 쓴 일기였단다.
그게 거의 20년 전이라 정확한 내용이 생각 나지는 않지만, 예쁜 나뭇잎 하나가 말라
책갈피처럼 꽂혀 있었고,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나의 아버지의 글씨에는 사랑이 가득 묻어있었어.
그때 나의 아버지는 결혼은 했지만 직장을 구한 상태가 아니었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중이셨어.
확실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고민과, 곧 태어날 나를 기다리는 마음과,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한
설렘과 걱정이 함께 그 일기장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어.
그 일기장을 읽었을 때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그만 소리내서 엉엉 울고 말았어.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나대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고
뭐랄까, 그 때는 나 자신이 좀 한심하게 느껴졌던 시기였거든. 그런데 그 일기장을 읽는 순간
무언가에 압도되는 기분이었어. 차마 내가 헤아리지 못할 만큼 깊은 사랑이 그 어떤 언어로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그러니까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내 감정과 일기장 속 내 아빠의 감정이 만나 눈물로 터지는,
그런 순간이었단다.
'내가 이렇게 큰 사랑을 받고 있었구나'
아마 그 기억이 이 일기를 쓰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아니었나 싶어.
기록은 기억보다 정확하고, 또 솔직하니까.
#엄마와 아빠의 만남
엄마는 26살, 라디오방송 아나운서를 1년넘게 하고 있을 때였고,
아빠는 28살, 지금 다니고 있는 기업의 신입사원으로 들어온지 몇 개월 안 되었을 때였어.
소개를 받아 연락처를 주고받고, 며칠간 연락을 주고받다가 드디어 서로 같이 얼굴보기로 한 날.
부산 남포동 대영시네마 앞에서 만나기로 한 날. 너의 아빠가 미용실에서 머리 하느라 1시간 늦게 나오게
되었고, 나는 근처 카페에 가서 책을 보며 너의 아빠를 기다렸어. 2011년 12월 29일이었단다.
엄마 성격 알지? 시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
라디오 생방송을 오래 하다보니 초 단위로 시간을 나누어 맞추는 게 습관이 되어서
아마 그땐 시간관념이 더 강했을거야. 그랬던 엄마가, 첫만남부터 1시간 늦은 아빠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엄마는 재미있다 생각했어. 기분이 나쁘다거나 실망한 게 아니라,
뭐랄까 신기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것 같아.
엄마는 카페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아했기에 책을 보며 너의 아빠를 기다렸단다.
그러면서 생각했지. '이상하다. 왜 기분이 나쁘거나 서운하지 않지?'
나 자신을 신기해 하면서, 곧 만날 너의 아빠를 기대하며, 설레어 하면서.
처음 만나는 날 너의 아빠가 걸어오던 모습이 엄마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생생해.
수많은 인파들 속에 네 아빠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어. 너무 잘생겨서 첫눈에 뿅 반했다 뭐 그런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아웃포커싱 되고, 저 멀리 걸어오는 네 아빠만 선명히 보이는 느낌. 처음 겪어보는 느낌.
(너의 외할아버지도 네 아빠를 기차역에서 처음봤을 때 그런 느낌이 있었다고 하더구나. 신기하지?)
결혼할 사람을 만나면 ' 이 사람이다 ' 하고 느낌이 온다고 하잖아.
엄마에게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 사람은 뭔가 특별하다는 느낌이 들었어.
웃는 모습도 닮았고, 부모님과의 고민도 비슷했고, 어쩌다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을 때도 있었어.
어딜 가든 뭘 하든 쿵짝이 잘 맞았고, 싸운적은 거의 없었단다. 네 아빠가 엄마한테 잘 맞춰준 적이 많아.
20대의 엄마 아빠는 둘 다 감정에 솔직했어. 좋으면 좋은대로 표현하고, 내숭을 떨거나 밀당 하지도 않았지.
서로 처음 만난지 일주일만에 사귀게 되었고, 28살이던 네 아빠는 어느날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어.
자기는 2년 안에 결혼할 생각인데 그 시기에 엄마를 만나고 있다고(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거라고).
그때부터 엄마는 "결혼"이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단다.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주위에 결혼한 친구들도 없어서 낯설게만 느껴졌지만, 네 아빠랑 결혼을 한다면 재미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무엇보다 너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정말 좋은 분들이셔서, 엄마도 결혼을 전제로 네 아빠를 만나게 되었단다. 사귄지 얼마 안 되어 각자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게 되었고, 1년 후 상견례를 하고 결혼날짜를 잡았어.
엄마도 어렸고, 아빠도 어렸고, 둘다 친구들 중 가장 먼저 결혼을 하게 되었지. 엄마는 27살, 아빠는 29살에.
10년이 지난 지금, 엄마랑 아빠는 딱히 싸울 일이 없이 잘 지내고 있는데,
네가 17살인 그때도 엄마 아빠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지? 대화도 많이하고 장난도 치면서 지금처럼 화목하고
즐거운 가정을 꾸리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단다. 아무 일 없이 평안하게.
우리 딸, 넌 어떤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될까?
딸은 아빠와 비슷한 남자에게 끌린다고 하던데, 네 아빠처럼 재미있고 유쾌한 사람을 좋아하게 될 것 같아.
웃는 얼굴이 예쁘고, 생각과 행동을 멋지게 하는 남자이기를. 널 행복하게 만들어줄 사람을 만나기를.
딸 가진 엄마이기에 사실은 설렘보다 두려움이 더 앞서지만, 남자친구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엄마가
되어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단다. 겉으로 내보이는 마음보다, 속에 담긴 진심이 더 깊은 너라는 걸 알기에,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소통이 잘 되는 엄마가 되어 있기를.
# 7살의 너를 키우며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고 싶은 장면들
사소한 일상들이 시간이 지나면 더 애틋하고 그리워질 거란 걸 알아.
그리고 기록해 두지 않으면 가물가물해질 거란 것도. 사실 벌써 아기시절 네 모습이 가물가물해서
그때 찍어둔 영상을 무한반복하며 옹알이 하는 너를 그리워하곤 한단다.
엄마는 매일 어제의 네가 그립고, 오늘의 네가 예쁘고, 내일의 너를 그리며 살아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 장면을 몇 가지 기록해보려고 해.
[ 너와의 첫만남 ]
2016년 1월 7일 13:30 반짝이 탄생.
새벽 1시부터 시작해 12시간 가까이 진통하다가 자연분만으로 태어난 너.
뱃속에 있을때부터 한쪽으로 쏠려 있어 자연분만이 어려울지도 모르니 유도분만을 하자며
분만날짜를 1월 8일로 잡았는데 그 하루 전에 그냥 알아서 나온 반짝이.
응애응애 하던 아기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내 아기의 목소리라는 사실이
뇌 속에 들어오기까지 꽤 천천히 시간이 흐른것만 같은 기분.
아빠가 네 탯줄을 자르고 초록색 천에 둘러쌓인채 응애응애 하다가
내가 "반짝아~" 하고 말하자, 엄마목소리라는 걸 알았는지 안정을 찾고
새근새근 잠든 우리 아기. 하얗고 통통한 너의 얼굴이 아직도 엄마는 눈에 선하단다.
처음 내 품에 안겼을 때 그 따뜻한 너의 체온까지도.
[ 첫 눈맞춤 ]
육아를 하는 엄마에게 "신생아 시즌"이란 군대에 갓 입대한 신병의 훈련병 시즌과 맞먹는다고나 할까.
목을 가눈지 얼마 안되었을 때였는데, 다른 곳을 향하던 네 고개가 흔들흔들하며 내 얼굴이 있는쪽으로 향한 순간, 너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어. 엄마는 네가 눈이 작은줄만 알았는데(너 신생아때 사진 보면 알거야...) 그때 처음으로 크고 예쁜 네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반짝반짝 빛나는 그 어떤 보석보다
빛나고 아름다운 네 눈동자에 심장이 뛰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해.
네가 밤낮이 바뀌고 엄마는 불면증을 얻으면서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들도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