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헨님 Oct 31. 2019

묵혀 둔 고백들이 잔뜩 있어요,

전하고 싶은 말을 되새기는 일

회사를 그만둔 팀장님께 메시지를 보낸 날에 나는 정말 울었다. 언제고 감정을 켜고 끄는 버튼이 있다고 치면, 그 일은 최근 내 눈물자극 버튼이었다. ‘저에겐 최고의 팀장님이셨어요’라는 말은 탈탈 털어도 투명한 진심이다. 더 하고 싶었던 말은 문장이 되어 맴도는데, 그냥 그걸 가슴속에만 내내 굴리며 안고 지냈다. 꼭 다시 함께 일해요, 와 그 자리에 계실 때가 그립다는 말과 동동거리며 슬퍼지는 감정들을 쏟아내고 싶었는데 조금만 열어도 대책 없이 밀려 나올 것 같아서. 그걸 받을 사람이 준비된 만큼이 아닐지도 몰라서, 생각만 굴리다가 그냥 두었다.


지금의 쨍한 감정을 전할까, 시간을 들여 지켜볼까.


아침에 한창 회사로 향하는 동안, 나의 연인은 때로 메시지를 남긴다. 오늘도 사랑한다는 고백이나 항상 긴장하고 아끼면서 살리라는 약속의 말들을. 나는 사무실에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고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메신저를 열어 그걸 꼭꼭 새기며 읽는다. 그리고서 상상한다. 나보다 이른 출근시간에, 지하철 2호선에 타고 있었을 그 산란한 아침 풍경과 역에서 빠져나와 살짝 땀이 배어 나올 만큼 약간 경사진 그 길을 걷는 모습을 떠올린다. 시간이 조금 남았다면 건물 앞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갈까, 멈추어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것이다. 연기를 뱉으며 서서 건너편을 바라보다가 반짝 생각난 듯 메시지를 타이핑하는 그 사람의 모습.


이런 이미지를 연상하는 시간과 사랑의 말들이 도착하는 일은 매일 일어나지 않는다. 그건 한편 다행한 일이다. 늘 습관처럼 성실히 사랑받는 것은 의외로 섭섭한 일이니까. 문득 현재에 나누고 싶은 감정이 생겨났어, 그래서 그걸 이렇게 지금 너에게 전해. 그런 생생함이 폴폴 묻은 고백이 훨씬 좋다.


그러니까 지금, 지금 말해. 생각났을 때 바로.

망설이다가 후루룩 흩어지기 전에.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하겠는가If not now, then when?는 자기계발서의 제목이기도 하고, 영어로 쓰인 홍보 포스터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거랑 넌 뭘 기다리는 거야?What are you waiting for?라는 다그침은 한 세트. 내겐 통째로 익숙한 말들이다. 근데 꽤나 솔직한 편이라고 자부하면서, 나는 순간 망설이고 은근히 서성인다. 보고 싶고 좋아하고 친해지고 싶고,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관심 있다는 표현을 하려면 일단 한숨 돌리며 관찰한다. 안전한 상황에서만 속을 내 보이려고 빼꼼 눈을 굴려 살핀다. 그러다가 전하지 못한 애정의 말들이 구형 전자제품의 설명서만큼 남았다. 그건 흐물흐물 바래고 낡아버려서 뒤늦게 꺼내어놔도 쓸모가 없는데.




가슴에서만 반복한 소리들이, 입으로 전한 말 보다 선명할 때가 있다.

고등학생 때는 0교시라는 게 있어서 새벽만큼 일찍 하루를 시작해야 했었다. 밖이 한밤처럼 깜깜한데, 엄마는 함께 일어나서 나를 챙겼다. 무척 희미해진 그 시절 중 파편으로 남은 한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나는 식탁 앞에 앉아 있다. 나는 엄마를 바라본다. 엄마는 싱크대를 보고 서서 무언가를 챙기는 중이다. 나는 서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 무탈하고 고요한 새벽의 장면을 기억하는 건 내가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고마워. 엄마, 사랑해.’

물론 그 말을 소리 내어 전하진 않았고. 난 늘 피곤했고 예민했으며 부모가 몹시나 귀찮은 십대였으니 그런 살가운 멘트를 그때는 더욱이 했을 리 없다. 근데 정말로, 내 안에 있는 목소리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엄마, 고마워. 엄마, 사랑해.


가족과 떨어져 독립해 지내면서, 조용한 내 방에서 해가 져 어둑해질 때 불끈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솟을 때가 있다. 우리 가족을, 내가, 더 행복하게 해 줄 거야, 라며. 가족을 다 이끌고 갔던 동남아 여행, 마지막 밤에 밥을 먹으면서 나는 정말 울었었다. 함께 내내 붙어 다니느라 고생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져서 건배사 비슷한 걸 하다가 줄줄 울었다. 그런 진심의 감정을, 특히나 가족에게 말로써 내놓은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고서 요즘 엄마에게, 아빠에게, 형제에게 생각난 말들은 꼭꼭 접어두기만 한다. 대신 다른 걸 건네본다.

자꾸 속에 가스가 찬다던 건 좀 어때? 새로 산 냉장고는 마음에 들어? 이번에 나온 뮤지컬 표 아빠랑 볼래? 물음표 붙은 관심의 언어들을.



그래서 오늘은, 마음만 요리조리 굴리다가 팀장님한테 문자를 보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로 시작하여 내가 정말 눈물이 났었다고. 빈자리를 느껴서 때때로 슬퍼진다고. 고작 이런 중요하지도 않은 알림을 띄우려고 나는 문득문득 행동을 멈추고 멍해지기까지 했었다. 꼭 다시 보자는 답을 받고 나자, 나는 한번 더 조금 울고 개운해졌다. 좋아하고, 존경하고, 그립고, 슬펐고. 분하고! 궁금하고? 듣고 싶고- 그런 걸 전함에 있어선 좀 더 부지런해져도 될 것 같다. 밀려 나오는 감정을 잘 들여다 보고 정체가 명확해졌을 땐, 특히 그게 좀 뭉클할 때는 묵히지 않도록 할 거다.

지금 떠오른 얼굴과 전하고 싶은 말들이란,
그저. 정말. 소중하고 또 소중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