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차 콘텐츠 기획자의 고백
당장 취향을 깊게 공유하고 싶은 매력적인 새 친구가 눈에 띄기를, 정확하게 알고 싶었거나 언젠가는 꼭 해 보고 싶다고 적어 두었던 분야의 강연이 발견되기를, 나와 같은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가 나타나기를 바라며 감각을 세우고 탐색합니다. 도착하는 메일의 대부분이 (광고) 머리말을 달고 있다 해도, 메일함을 열 때마다 설레기도 해요. ‘아카데미, 도서관, 세미나, 모집, 지원, 강연, 공고…’ 좋아하는 브랜드에서 스페셜 할인 쿠폰을 넣어 준다는 소식보다도 이런 단어들이 눈에 띄면 가슴이 뜁니다. 늘 어딘가에서 새로운 제안을 담은 편지를 보내 주기를 기다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브랜디드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든 지 벌써 12년 차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고백하자면, 사실 저는 (제 자신에 자격에 관해서는) 꽤나 겸손함을 장착한 사람입니다. 이건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해요. ‘아이고, 내가 뭐라고’라는 생각이 자주 들기 때문에 항상 복기하고 학습하고 매번 굉장히 몰입합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일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을 계속해서 미뤄 두었습니다. 사실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었거든요. 몇 년 전에는 ‘직업에 관한 글쓰기’ 모임을 직접 만들기도 했습니다. 1년 정도 함께 하다가 각자의 온도 차이로 활동을 종료하고, 어딘가에서 나에게 일에 관해 질문해 주기를 계속해서 기다렸죠. 직무 멘토링 봉사활동에 참가하거나 회사에서 만나는 인턴 후배들에게 중요한 역량과 기술을 전수해 주기도 하고요. 그런 것을 하면서 욕구를 살짝살짝 채우며 시간이 잘 지나갔지요. 꾸준히 늘 하고 싶었는데, 제일 잘하고 싶어서 한쪽에 놓아둔 일을 이제야 해 보려고 합니다.
성공적으로 몇 개 프로젝트들을 이끌어 보고,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고, 콘텐츠 파트의 리더를 맡게 되고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자주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한결같이 이 직업을 아주 좋아하고 업무를 더 잘하고 싶어서 매일 연구하고 시도하고 결과를 만드는 일이 변함없이 재미있습니다. 정말 재미있어요. 얼마나 재미있냐면, ‘세상에 이렇게 멋진 직업이 있다니!’라고 속으로 종종 감탄하고, 이 직무를 나에게 쥐어 준 회사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때론 이 자체가 인생에 온 큰 행운 같아서 ‘더 사람들에게 잘해야지, 더 많이 베풀면서 살아야지’ 다짐도 합니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벅차게 말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이런 질문을 받아요.
”혹시, 종교 있으세요? “
신앙심이 깊은 홀리한 사람 같이 보이나 봐요. (실은, 무교예요)
‘이제는 시작해도 되겠어.’
갑자기 이 문장이 떠올랐어요. 작년 11월이었고, 드래곤 시티 호텔에서 열린 <2023 콘텐츠 마케팅 서밋>에 참가해 강연을 듣고 있을 때였고요. 저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지만, 개인 SNS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이름과 정체를 드러내고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는 공간에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에 공포심이 컸어요. 이것도 아마 ‘아이고, 내가 뭐라고’ 정신에서 시작된 것이겠죠. 그러다가 생각이 스친 순간, 그냥 시작했습니다. 계정을 만들고, 콘텐츠 서밋을 듣는 기획자의 소감을 짧게 써서 포스팅을 올렸어요. 활자 중독자인 만큼, ‘threads 스레드’를 선택했고요. 막상 올리고 보니 아무의 비난도 없고, 어쩌면 가장 두려워했던 ’네가 뭔데 (이런 걸 써)‘라는 반응도 없고 마음은 평온했고 또 메일함을 열 때처럼 설렜습니다. 그래서 다짐했어요.
매일, 평일 오후 4시에는 스레드에 짧은 글을 쓴다.
기획자로 살면서 배운 것들, 오늘 한 업무에서 얻은 인사이트 같은 걸 가볍게 쓰기로요, 잘 쓰려고 하지 않고, 대단히 멋진 말을 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하겠다고요. 그 이후로 5개월이 지났고, (가끔은 건너 뛰지만) 아직 여전히 매일 오후 한 개의 짧은 ’ 직업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0에서 시작한 팔로워는 현재, 562명이나 되었어요! 그것보다 기쁜 것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글을 꾸준히 발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 책에서 본 인상 깊은 말이 있어요. ’ 암묵지‘를 ’ 형식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전문가의 역량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제가 하는 모든 일이 그야말로 ‘암묵지’라고 생각했어요. 콘텐츠 조직의 인력과 프로세스를 초기 세팅하는 일, 프리프로덕션이라는 기획 단계를 감각적으로 하는 것, 촬영장에서 명확한 디렉션을 주는 법, 기술자들과의 후반 작업 등 큰 업무뿐 아니라 미학적으로 숏을 구성하는 안목, 일반인 출연자가 카메라 앞에서 긴장을 풀게 하는 말들, 각 분야의 기술자들을 잘 섭외하는 법 같은 것은 저 또한 매뉴얼을 통해 배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실패하고 헤매고 성과를 만들면서 10년이 넘게 익힌 것들이니까요. 스레드에 글을 꾸준히 올리면서 가장 기뻤던 댓글은, 뉴욕 대기업 아트 디렉터로부터 받은 ‘와, 이걸 이렇게 글로 잘 풀어주시다니!‘라는 감탄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저의 암묵지가 형식지로 제대로 담기고 있다는 피드백이었죠.
* 암묵지 : 학습과 경험으로 체화되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지식 혹은 노하우
* 형식지 : 문서나 매뉴얼처럼 외부로 표출되어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
요즘 대부분의 회사 사무실에서는 ’ 사수‘라는 개념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어요. 사내에서는 서로가 어떤 직급인지도 비공개여서, 업력이 더 오래된 사람을 가리기도 어렵습니다. 저는 신입사원 때, 그때 배웠어야 할 것들을 모두 선배들로부터 배웠습니다. 그 시절을 그냥 지나쳤으면 영영 몰랐을 것들을 당연한 권리처럼 손쉽게 배웠어요. 편집실에 찾아와 여러 번 피드백을 주며 점점 더 나아지는 영상 구성을 알려 준 Y선배, 비주얼 시안을 구성하는 방법과 A컷을 알아보는 눈을 점차 단련시켜 주신 포토그래퍼 K 과장님, 프로젝트의 판을 전략적으로 구성해 설득하는 비즈니스 문서의 비기를 전수한 W선배님. 다양한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첫 회사는 직급 대신 서로의 이름에 님을 붙여 부르는 ‘님 문화’가 기본이었지만, PD로 입사한 저는 ‘PD 조직의 선후배 문화’를 따랐습니다. 덕분에 안전하고 유리했었다고 기억합니다.
이후에 브랜디드 콘텐츠 기획자로 특화된 프로젝트들을 담당하고, 10년 차에 브랜드 회사로 옮기면서 똑같은 길을 걸어온 사수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문득 깨달았습니다. 지금 하는 일도 누가 더 전문가라고 특정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멘토와 멘티 모두를 설레는 마음으로 탐색하면서, 저는 직업에 대한 글을 꾸준히 쓸 생각입니다. 대단한 인사이트를 남기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저 누군가 이 길을 걷고 있는 동료, 조금 헤매는 기분을 느끼는 이들, 갓 시작한 후배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줄 수 있어도 기쁘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일을 너무 좋아해서, 결국 사람들을 만나도 일 이야기를 하게 되고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직업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네요.
올해, 단단한 결심을 하다 보니 자꾸 그런 일들이 저에게 다가오고 있어요. 회사의 임직원 칼럼니스트가 되어 글을 발행하게 되었고, 다음 달에는 연세대에서 열리는 직무 특강에 연사로 서게 되었어요. 제 머릿속에 늘 맴돌던 제 글들의 제목이 있습니다. 그 주제를 줄기로, 작고 귀엽고 때로는 형편없고 가끔은 눈에 띄는 열매들을 쭉쭉 만들어 보겠습니다.
일요일 오후, 용기를 내어 <권하고 싶은 직업>의 첫 글을 이렇게 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