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또 새벽 3시 38분이었다.
알람을 맞춘 것도 아닌데 늘 정확히 이 시간이다.
출근 준비를 아무리 천천히 해도 시간이 남고 그렇다고 도로 잠을 청하자니 애매한 시간이다.
전에는 그저 체념하고 일찌감치 씻고 집을 나서 회사로 향했었다.
어차피 불편한 사람과 한 집에 있기도 싫었고 새벽 공기를 마시며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커피나 토스트를 먹거나 책을 읽는 시간이 좋았으니까.
이혼 후 한동안 잘도 숙면을 즐기더니 요즘 들어 또 새벽 세시 삼십팔분의 저주가 시작된 까닭이 뭘까.
희한하게도 새벽 일찍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탄수화물이 당긴다.
고민과 스트레스로 늦게까지 잠 못 이루고 일하던 뇌가 시위라도 하는 건지 탄수화물의 당분을 강하게 요구하는 것이 느껴진다.
냉장고엔 엄마가 가져다 준 고들빼기에 더덕구이 뿐이라 맨밥에 반찬이라도 먹어야 하나 싶지만 내 몸이 원하는 건 그보다 더 달고 자극적인 길티 플레져다.
배달앱을 켜 보지만 하나같이 마땅치 않다.
말 그대로 뜬눈으로 몇 시간을 버티다 열 시가 되자마자 지갑을 챙겨 와플 앨리로 달려왔다.
설탕이 콕콕 박힌 리에쥬 와플 위로 슈가파우더를 뿌리고 캬라멜라이즈한 슈가 시럽을 얹은 얼그레이 아이스크림을 곁들인다.
커피는 거들 뿐, 황홀한 탄수화물 파티가 시작된다.
그러고 보니 성신여대 정문 앞 골목에 위치한 와플 앨리와의 인연이 꽤 오래 되었다.
연애할 때 단골 데이트 장소기도 했지만 희한하게도 여기는 주로 내 마음이 힘들 때 병원처럼 찾던 곳이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전남편에게 이혼하자는 얘기를 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번엔 이혼 의사를 밝힐 장소를 꽤나 오래 고민했었다.
결혼한 지 2년 되었을 때 내게 큰 잘못을 했던 전남편에게 이혼하자는 말을 처음 꺼냈었는데 그 땐 밤새 싸우고 울다 지쳐 있는 상태로 침대에 앉아서였다.
기운이 빠져 침대에 앉은 채로 이혼하자고 말하는 나에게 그는 여전히 취한 상태로 고개를 숙인 채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고, 결론이 나지 않는 대화에 진이 빠진 내가 스르륵 눕자 쭈볏대며 다가와 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일상을 함께 하던 익숙한 공간이었기에 나는 더 단호하지 못했고 결국 그 때 각서를 받고 넘어갔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다 3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하고 이혼에 이르게 되었다.
이번엔 그런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별거 중이었기도 했고 다시 둘만의 공간으로 돌아가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밥상을 앞에 두고 할 만한 성질의 이야기도 아니고 술은 더더욱 부적절했다.
공원을 걸으며 이야기할 수도 없고 요즘 애들처럼 미친 척 이별 여행을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커피 외엔 남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스타벅스 같은 프랜차이즈는 너무 가벼워 보이고 호텔 라운지는 과했다.
장소를 고민하느라 마음이 힘들어지자 저절로 와플 앨리가 떠올랐다.
여기다 싶었다.
우선 내가 이 곳에 가면 심신의 안정을 찾는다.
약속 시간 삼십분 전에 도착해 미리 창가 2인석 자리를 잡고 할 말을 고르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에 선 사람마냥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급하게 뛰었다.
그 날 나는 내 할 말을 했고 들으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한 말을 들었고 처음으로 와플 앨리에서 와플을 주문하지 않고 일어서 나왔다.
이후로도 잠 못 이루는 밤은 계속되었다.
이혼보다 더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불행의 밑바닥이라 생각했을 때 더 지독한 고통이 마중나오는 것이 인생이더라.
숙면이 취미이자 특기였던 내가 오랜 시간 불면에 시달리며 낯빛이 어두워지고 피부가 상하고 표정이 바뀌었다.
긍정과 행복의 기운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내가 우울과 불행의 아우라를 풍기며 주변에 폐를 끼치기 시작했다.
타르보다 더 끈적한 그 불행의 늪에서 빠져 나오는 데 꼬박 2년이 넘게 걸렸다.
이제야말로 겨우 평온한 일상을 찾은 줄 알았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어라.
속 편하게 안심하고 있을 때 운명은 나를 조롱하듯 부지불식간에 뒤통수를 세게 때렸다.
불면의 밤이 다시 시작된 올해 5월, 눈을 뜨자 보인 시각 새벽 3시 38분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쯤 되면 혹시 내 인생은 트루먼쇼가 아닐까 싶었다.
또다시 잠들지 못하는 밤이 지속되길 4개월째, 오늘도 술기운을 빌어 잠을 청해볼까 한다.
아무래도 다시 와플 앨리에 갈 때가 된 것 같다.
그곳에서 달디 단 탄수화물 덩어리를 뱃속에 밀어 넣으며 내게 다시 찾아온 불행도, 슬픔도 같이 소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행복까진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더는 불행해지지 않도록 달콤함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맬 것이다.
잠깐의 당 충전이 내게 다시 안정을 되찾아 주기를, 3시 38분이라는 불행의 숫자가 익숙해져 버리지 않기를,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충분하고 깊은 잠을 청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