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RX'D의 민족입니까
크로스핏 경력 3개월 만에 오픈 참가한 썰 푼다.
2월이 되자 박스가 묘한 들뜸과 흥분으로 술렁였다.
귀동냥을 해 보니 '오픈(OPEN)'이라는 전 세계적인 크로스핏 대회가 열린다는 모양이다.
함께 운동을 하는 메이트들이 당연하다는 듯 전원 대회에 참가 등록을 한다기에 나 역시 고민이 되었다.
무턱대고 등록하자니 작년 연말의 악몽이 떠올라 무서웠기 때문.
우리 박스에서는 1년에 두 번 큰 행사가 열리는데 작년 12월에 진행된 'Year-end Party'가 그 중 하나다.
당시 나는 크로스핏을 시작한 지 고작 2주차인 햇병아리였고 파티라는 말에 술 마시고 노는 송년회를 상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참가 신청을 했다가 큰 봉변을 당했다.
이 지독한 크로스피터들이 말하는 '파티' 가 각종 와드로 이루어진 체육대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6인 1조로 팀 와드를 수행하면서 민폐가 되면 안된다는 생각에 난생 처음 잡아 보는 35lbs짜리 바벨을 들고 데드리프트며 동작도 생소한 쓰러스터를 30개씩 해대고 결국 몸져 누워 물리치료 대장정을 감행해야 했다.
그러나 2주 차에 체육대회도 해냈는데 3개월이 된 지금 오픈이라고 못할소냐, 늘 별 생각 없이 사는 나는 이번에도 고민 없이 20달러를 내고 오픈 참가 신청을 해 버렸고 결과적으로 후회 없는 즐거운 3주를 보냈다.(진짜?)
일견 고인물들만 참가할 수 있을 것 같은 위압감이 느껴지지만 실상 그 이름에 걸맞게 오픈은 경력과 실력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RX'D 레벨의 와드(WOD, Work Of the Day)에서 버전 다운한 레벨의 스케일(Scaled) 와드가 제시되고, 생짜 초보나 고령자를 위한 파운데이션(Foundation)버전 역시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RX'D에서 65lbs짜리 바벨로 쓰러스터 동작을 수행해야 한다면 같은 와드지만 스케일 버전에서는 45lbs부터 시작하는 식이다.
말 그대로 각자의 수준에 맞는 운동 처방이 제공되는 것.
RX'D : Prescription of the Day, RX는 처방prescription을 뜻하는 미국의 약학 용어. 제일 쎈놈을 위한 와드 수준이다.
Scaled : 말 그대로 RX'D를 스케일 다운한 버전. 평상시 운동을 할 때는 크로스피터 절반 정도는 스케일 버전으로 와드를 수행한다.
Foundation : 초보자를 위한 매우 쉬운 버전의 와드 수준. 크로스핏을 처음 시작했거나 신체적 조건이 일반인과 다를 경우 파운데이션 버전으로 와드를 수행한다.
남/녀로 나뉘어 성별에 따른 신체 조건의 차이를 인정해 주고 거기에 실력과 경력에 따라 레벨을 선택해서 참가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오픈 만세고 크로스핏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적합한 운동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 나라만이 오픈 참가 신청 비율로 볼 때 Rx'd 등록 비중이 스케일을 압도하니 과연 우리는 Rx'd의 민족이 맞다.
평소 스케일로 와드를 하던 사람들도 순위가 발표되는 이런 대회만 열렸다 하면 무리해서라도 Rx'd를 수행하는 모습이 크린이인 내겐 인상 깊었다.
어릴 적부터 경쟁 사회에 길들여진 슬픈 민족이라 그런 건지, 한 때 중원을 호령했던 고구려인의 전투 DNA가 유전자 깊이 남은 건지는 모를 일이다.
물론 쪼렙인 나는 당연하게도 스케일로 참가했는데 우리 박스에서 스케일을 선택한 사람은 전체 통틀어 나를 포함한 4인 뿐이었다.
그리고 그 4인 중 나는 놀랍게도 꼴찌가 아니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