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임신 9주 4일차이다.
검진을 위해 산부인과를 갔다. 의사는 태아가 심장 소리가 멈추었다는 소견을 내렸다. 아내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지난주 들었던 우렁차고 건강한 심장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반대로 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내 심장 소리가 귓가에 쿵쾅 울려 퍼졌다. 두 번째 유산 판정이다.
아내는 A 병원 의사의 진단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충무로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J 여성전문병원으로 예약했다. R 교수 예약을 잡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유산을 두 번 하는 경우는 산모 100명 중 5명에게 흔히 발생하는 일입니다. 안타깝습니다. 계류 유산입니다.”
아내와 내 앞에 마주 앉은 의사는 차분한 말투로 설명해 주었다. 차분하지만 위로와 안타까움이 섞인 말씨였다. 의사 두 명에게 유산 판정을 받았다.
“C 님 들어오세요.”
충무로 J 여성병원 지하 1층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는 철문 수술실 앞에 아내를 호출하는 간호사의 음성을 들었다. 계류 유산 후 소파 수술을 해야 한다. 자궁 내막에 사망한 태아와 조직을 긁어내는 수술이다. 수술을 마쳤다. 마취약에 취해 걸음이 온전치 못해 비틀거리며 아내는 수술실을 빠져나왔다. 마취약에 취한 얼굴은 초췌해 보였다. 눈동자의 초점은 정확하지 않았다. 슬프고 깊은 심연을 보았다.
“나는 애도 못 낳는 년인가 봐”
집에 돌아온 며칠 후 가슴이 찢어지는 말 한마디를 들었다. 두 번째 유산을 하면 슬픔이 덜할까… 첫 번째보다 오히려 더욱 깊어지는 우울감이 찾아왔다.
고단한 회사 일과 아이를 떠나보낸 슬픔은 동시에 찾아왔다. 나는 당시 회사에 다닐 수 없을 만큼 건강은 악화됐다. 정상적인 의사결정을 못할 수준의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퇴사했다.
아내도 연이은 유산으로 마음속 깊은 상처가 났다. 둘이 빈집에 있으면 더 깊은 우울감이 찾아왔다. 아내는 눈물을 자주 흘렸다. 주변의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잠시 아무도 우리는 모르는 곳으로 떠날 결심을 했다.
2014년 5월 나와 아내는 대한민국 정반대 남반구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 킹스포드 스미스 공항에 도착했다. 짙푸른 빛이 푸르다 못해 진짜 파랗다 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하늘색을 가진 이국적 도시를 만났다. 뜨거운 태양 앞에 나와 아내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새출발을 응원하는 화이팅을 다짐했다.
다짐했던 화이팅은 무색해졌다. 바로 시련은 닥쳐온다. 돈을 쓰는 관광객에게는 타국은 친절하다. 삶을 살아야 하는 이방인에게는 타국은 차가운 존재이다. 우리에게 살 집을 당장 찾아야 한다. 경제활동을 이루지 않으면 굶고 실패한 짧은 외유로 끝날 판이다. 하지만 나에게 초인적인 힘이 준 것 같다. 힘든 일을 겪고 와서인지 타국의 정착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내와 내가 몸을 누일 수 있는 단칸방을 구했다. 나는 호주 정부에 세금을 내는 정식 한국계 기업에서 세일즈 매니저 직업을 구했다. 말이 좋아 세일즈 매니저이지 백화점에서 핸드폰 케이스를 팔며, 아이폰 액정 수리하는 기술을 익혀 한국과 전혀 다른 직업을 살게 되었다. 아내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어학원을 등록하고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아내와 나 둘 다 20대 시절 어학연수를 다녀와 해외 생활에 잘 적응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돈 앞에 장사가 없다. 호주 물가에서 가장 끔찍한 부분은 주거비이다. 내 소득의 절반은 단칸방 렌트비를 납부해야 한다. 점점 경제적으로 지쳐 가기 시작했다.1주일 용돈은 50달러이다. 하루에 커피 한 잔 사먹을 수 있는 돈과 출퇴근 지하철 요금이 전부였다. 점심 식사는 때론 끼니를 굶거나 간단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나는 점점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살림을 도맡은 아내는 점점 더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바닥나는 잔고에 퇴근 후 마실 수 있는 맥주 한 캔을 사네 마네를 두고 아내와 다툼이 잦아들었다.
‘아 내가 번 돈으로 내가 맥주 마시겠다는데 왜 지랄이야.’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카톡을 주고 받았다.
샤워하고 나왔는데, 아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또 왜 저러지’ ‘왜 이렇게 사람이 부정적으로 변했어’ 나는 아내를 속으로 원망했다. 차가운 시선과 등을 돌리고 겨우 잠을 청했다.
서로 말을 하지 않은 지 3일이 지났다. 아내가 입을 열었다.
“이혼하자. 나 먼저 한국 갈 테니 짐 싸서 나중에 귀국해. 한국에 가서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니 나중에 들어와.”
“뭐? 무슨 소리야?”
“실은 샤워하는 동안 우연히 오빠 카톡 봤어.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니.. 이제 그만 해야 할거 같아.”
‘정말 이혼해야 할까?’ ‘이게 맞는 것일까?’ 의문을 품었다. 정말 진지하게 이혼하는 게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내 안에 무슨 생각이 하는거지…
두 번의 유산으로 아이를 떠나보내고, 회사는 뜻대로 되지 않아 몸과 마음은 망가지고 이제 가정도 잃는 걸까? 부부 관계는 돌아갈 수 있는 걸까? 눈물이 쏟아졌다. 정말 엉엉 울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함이 사무칠 정도로 가슴에 박혔다. 더 좋은 삶을 살고자 이역만리까지 왔는데, 상처를 줄 수 밖에 없는 나의 행동에 주체 할 수 없는 감정이 눈물로 표현됐다. 아내도 눈물을 흘렸다.
“유산이 된 게 괜히 그런 게 아닌가봐” 라는 칼날 같은 말이 가슴 깊이 박혔다.
이 일을 겪고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사랑하는 아내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고 살았는지. 어쩌면 이역만리까지 내가 우겨서 데리고 와놓고 책임지지 않았는지 뼈저리게 반성했다.
그리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대화를 깊숙이 나누었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알고 있다는 착각에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살았다.
시드니에 겨울이 지나갔다. 봄이 찾아왔다.
봄바람이 불어오는 아침 달링하버를 걸으며, 보랏빛 자카란다 꽃을 바라보았다. 달링하버에 앉아 햇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잠시 쉬고 걷고 또 걸었다. 하버브릿지를 건너 밀슨스 포인트에 가서 브런치를 먹었다. 아껴 쓰는 생활은 이제 인에 박혔다. 가끔 브런치를 사 먹을 수 있는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소소한 저축이 생겼다.
시드니 봄이 지나갔다. 여름이 찾아왔다.
5시 매장 문을 닫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해가 길어져 저녁 늦게까지 활동할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배드민턴 라켓을 사서 공원에 갔다. 둘이 웃으면서 배드민턴공을 주고받았다. 삶이 여유롭지 않지만 늘 행복하다. 아내와 차이나타운에 가서 배추를 샀다. 작은 플라스틱 대야를 샀다. 배추를 잘라 소금에 절였다. 우리 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김치를 만들었다. 조미료가 충분하지 않아 맛은 조금 부족한 느낌이다.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빨간 고추물이 생기는 김치를 바라볼 때 ‘우리가 김치를 다 담가 먹네’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2014년 1월 남반구 시드니 여름이 한창이다.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 2014년 설에 맞추어 우리는 가족에게 돌아가기로 했다. 열심히 모은 돈으로 뉴질랜드 남섬으로 떠났다. 캠핑카를 빌렸다. 빙하가 녹아 내린 우윳빛이 감도는 푸른 호수 레이크 테카포에 도착했다.
“오빠 나중에 우리가 아이가 생기면 꼭 이 곳에 다시 오자.”
아이와 캠핑카를 타고 우리가 누린 이 추억을 꼭 공유하고 싶다는 다짐을 했다.
2014년 2월 한국에 돌아왔다. 유산 판정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 A 병원에 찾아왔다. 다시 심장 소리를 들었다. 아이의 태명은 시드니에서 따와 ‘드니’라고 지었다. 2024년 드니는 11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