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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 Nov 25. 2021

착하게 말고 영악하게

인간관계에서 호구 잡히지 않는 법

프리랜서 방송 작가 일을 오래 하려면 한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 반드시 '휴식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직전까지 일했던 프로그램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야 그 위에 또다시 새로운 프로그램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능력 좋은 작가님들은 한 프로그램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다른 프로그램에서 미리 '찜'을 하기도 하지만...


두 달 반짜리 기획 프로그램을 끝내고 이번 주부터 휴식기를 갖고 있다. 휴식기 동안 우선적으로 하자고 계획한 일은 방송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뒤로 밀리는 주변 사람들 만나기와 책 읽기, 그리고 글쓰기다. 바쁠수록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을 먼저 챙겨야 하는데 방송 일은 한 번 시작하면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게 한다.


어제는 십여 년 전 연예 프로그램을 하면서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후배 작가와 통화를 했다. 시작은 교양에서 했지만 일찌감치 예능으로 노선을 바꿔 지금은 어엿한 예능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로 일하고 있는 후배다.

그녀가 나보다 나이가 몇 살이 어리더라. 방송 일 하는 사람들은 나이 가늠이 잘 안 된다. 나이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도 하지만, 작은 일에 웬만해서는 마음 쓰지 않고 일과 삶 사이의 균형을 누구보다 잘 맞추고, 매사 나보다 더 언니 같은 모습에 그녀를 한 번도 어리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녀와 언제 만날지 약속을 정하다 이번 프로그램을 함께 한 후배 작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서열로 치면 내 바로 밑인 세컨 작가인데, 나이나 연차가 나와 별로 차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 역시 시작은 교양에서 했지만 중간에 노선을 바꿔 예능 프로그램에서 경력을 쌓아 교양과 예능을 두루두루 잘 소화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촬영 현장에 강했는데 직전까지 일했던 프로그램의 피디들이 너무 무능해 (그녀 말에 의하면) 촬영 현장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결정과 진행을 작가가 해야 했다고 했다.

반면 교양 작가들은 촬영 현장에 잘 나가지 않는다. 가끔 나가더라도 현장은 피디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먼저 나서서 무언가를 하지는 않는다. 현장 상황이 달라지거나 프로그램적으로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만 같이 회의를 하고 진행 상황을 체크했다. 작가가 피디의 역할을 대신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굳이 현장에 나갈 필요도 없다. 대신 교양 작가는, 촬영이 끝나고 후반 작업은 피디에게 맡기는 예능 작가와 달리, 촬영이 끝나면 후반 작업에 말도 못 할 에너지를 쏟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촬영 기간을 후반 작업을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으로 삼는 게 일반적이다. 나 역시 이전까지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촬영 현장에 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번 프로그램은 교양보다 예능적인 요소가 더 강했다. 촬영과 후반 작업도 예능 형식을 따랐다. 그렇다 보니 후반으로 갈수록 나보다 세컨인 후배의 역할이 더 커지고 중요해졌다. 그때마다 '현장은 나보다 후배 작가가 더 잘 아는 영역'이니 마음 상해하지 말자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옹졸한 선배가 되지 말자, 잘 하는 사람에게 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하지만 촬영 현장에만 나가면 내가 너무 무능한 작가가 된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빴다. 게다가 함께 일한 피디들도 - 그녀가 전 프로그램에서 일했던 피디들보다는 조금 나았다고 하지만, 경험이 부족하고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점점 더 그녀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녀도 어느 순간 자신이 메인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섬이 되어 갔다.

문제는, 그 상황에 지고 싶지 않아 별 것도 아닌 일에 아등바등하고 초조해하는 모양새를 숨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차라리 쿨하게 모든 걸 인정하고 촬영 현장에 아예 나가지 말걸. 촬영 내내 불편하고 속상하고 기분 나쁜 상황이 이어졌다. 빨리 이 상황이, 촬영이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이런 이야기들을 그녀에게 하자 그녀가 말했다.

"그 세컨이 일을 잘 못하는 것 같은데요."

그녀는 예능에서는 메인 작가가 매일 출근하지도 않고 다른 많은 일을 하기 때문에 회의나 현장에 나갔을 때 세컨 작가보다 많은 부분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그렇다고 세컨이 나서서 돋보이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세컨 작가의 미덕 중 하나는 메인 작가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거예요."

이건 방송 작가, 그중에서도 예능 작가, 그리고 그녀가 속해 일했던 수많은 팀에서의 일일 수도 있지만, 세컨이 메인을 제치고 돋보이려고 할수록 팀 분위기가 안 좋아지고 그러면 팀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했다. 세컨을 오래 한 작가가 그걸 모를 리가 없고 메인 작가가 불편해한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을 거라고 했다.

"그러면 예능에서 메인 작가는 무슨 일을 해?"

"많은 일을 하죠. 아이디어도 내고 촬영 현장에서 출연자 관리도 하고, 또 팀을 꾸리고 이끌어 가잖아요. 세컨 작가는 그 밑에서 한 마디로 살림을 도맡아 하는 거고요. 그래서 세컨이 누가 오느냐가 되게 중요해요."

그리고 덧붙였다.

"근데 예능에서 그런 세컨들 되게 많아요. 혼자 돋보이려고 하는. 메인 뒤통수 치는."

"그러면 나, 걔한테 당한 거야?"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비슷한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같은 실수가 똑같은 패턴으로 이어지면 단순한 실수나 시행착오가 아니라 그게 그 사람의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촬영 내내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스트레스로 엄청난 회의와 우울감에 빠졌으면서 촬영이 끝나고 후배를 우리 집에 초대하기 까지 했으니. 물론 먼저 집에 오겠다고 한 건 후배지만 직전까지 그녀 때문에 힘들었던 점은 까마귀 고기를 먹은 양 까맣게 잊어버리고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그녀를 대접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한답시고 많은 말들을 해줬다.

결정적으로 만약 이번에 만든 파일럿이 정규 프로그램이 되면 투잡을 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거절의 표현을 하지 못했다.


착한 거 말고 영리하게 일하자고, 매번 다짐한다.

그러나 언제나 착하다 못해 만만한 사람이 되고 만다.

딴에는 분위기를 좋게 만들고 후배 작가들에게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려고 하는 행동들이 결국에는 나를 무시하는 태도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둥글둥글하게 일하고 팀원들에게 곤조를 부리지 않는 작가들이 모두 무시당하지는 않는다.

나는 어떤 문제가 있기에 매번 이렇게 당하는 걸까.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게 확실하다. 그러나 뭐가 문제인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원인을 모르니 나를 바꾸려 해도 잘 안 된다.

그렇다고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생긴 대로 살아야지 어쩌겠어, 하고 확 마음을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그래도 이번 일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다. 그리고 다음 일을 할 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이 나이에도 매번 시행착오를 반복하다니... 난 도대체...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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