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내 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충분히 최선을 다했다. 다시 한 달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만큼 열심히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결과를 받든 절대로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한 달 전 무척 마음에 드는 일을 시작했다. 인터뷰를 하고 그 내용을 토대로 기사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광고주는 기사지만 딱딱하지 않은 '따뜻한' 글을 원했다. 그동안 수없이 해 온, 영상에 글을 더하는 일이 아닌 오롯이 글이 주인공인 일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변화보다 익숙한 일이 좋아야 하는데 (내 자랑은 아니지만- 이렇게 시작하는 말은 대부분 내 자랑이지만) 점점 더 새롭고 안 해 본 일들에 끌린다.
그동안 열심히 갈고닦은 글쓰기 실력을 드디어 실전에 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자 (이 나이에) 며칠 밤을 새 가며 글을 써도 피곤한 줄 몰랐다.
그러나 "일은 깨끗이 해결해 놓았다 싶을 때 슬금슬금 꼬이기 마련이다"라고 천하장사 시구르드는 말했다. 첫 번째 글을 마무리하고 글 값에 해당하는 페이를 받을 때까지는 순조로웠다. 두 번째 글을 끝으로 더 이상 원고 청탁이 들어오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두 번째 원고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작가님 아직 임원 쪽 시사 중이라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네요."
두 번의 피드백을 받고 두 번의 수정을 거친 두 번째 원고는 2주 전에 광고주 손에 넘어갔다. 그러나 아직 광고주는 별 다른 피드백을 주지 않고 있다. 피드백이 없다는 건 페이 지급이 그만큼 미뤄지고 있다는 말이다.
프리랜서에게 가장 어려운 부분은 계약서 작성과 페이를 제때 지급받는 것이다. 두 가지는 별 개의 일이 아니다. 일한 만큼의 페이를 제대로 제때 잘 받으려면 계약서를 잘 써야 한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나는 이번에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작가님, 대기업이잖아요."
대기업. 대기업이 뭐라고? 그날 밤 남편은 대기업이라고 저렇게 말하는 게 제일 싫다며 (내가 담당자도 아닌데) 나에게 따져 물었다.
"아니, 꼭 대기업이라서기 보다 지금까지 그쪽에서 프리랜서로 일해 온 작가들은 모두 단 건으로 일했다잖아. 그리고 그렇게 일할 때는 따로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고 그래도 내가 원한다면 쓰기는 하겠지만 이런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알아봐야 할 것 같다고 해서 그냥 알았다고 했지."
(내가 담당자도 아닌데) 나는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이런 헛똑똑이를 봤나, 내가 절대로 계약서 쓰기 전에는 일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이제 남편은 눈으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기업인데 설마 돈 떼먹겠어, 다른 프리랜서 작가들도 다 그렇게 믿음과 신뢰 속에 일하고 있다잖아. 나중에 혹시 문제가 생기면 메일과 카톡에 페이와 지급 시기에 대해 나눈 대화 내용이 남아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담당자가 말했으니 별일 없을 거야,라고 역시 눈으로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까지 담당자이자 대기업의 일원인 그녀를 믿고 신뢰했다. 그녀는 첫 인터뷰를 나갔을 때 자신도 프리랜서로 일하다 좋은 기회에 경력직으로 입사했다며 수줍게 고백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 아니지만 약간의 동료애를 느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일로 만난 사이지만 그녀에게 조금 더 마음을 열고 열심히 했다(아니다. 난 일과 개인적인 감정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늘 필요 이상으로 열과 성을 다하는 게 문제다. 그러고 꼭 뒤통수 맞았다고 울고불고....). 그녀 역시 작가님 입장에서 최대한 많은 부분을 맞춰드리겠다고 했다. 그 순간의 진심을 나는 믿는다. 물론 아직 어떤 결과 지도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녀가 나의 믿음과 신뢰를 저버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최종 원고를 넘긴 지 2주가 넘도록 초반과 달리 그리 급할 것 없다는 식으로 나오는 광고주 태도에 천천히 결과를 알려달라고 웃으며 답했을 뿐이다.
올 해가 시작되기 전인 작년 12월에 카톡으로 한 해 운세를 상담받은 적이 있다. 문득 그때가 생각 나 지난 카톡을 열어봤다.
주요 내용은 내년은 올 해보다 바쁠 것이다. 3월까지는 큰돈 안 되는 자잘한 일들이 들어오겠지만(며칠 전까지 벌처럼 부지런히 일하지만 거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는데) 4월부터는 일이 빠르게 들어오고 진행될 테니 3월까지는 작은 일이라도 심기일전한다는 심정으로 웬만하면 다 하라고 했다. 그러면 올해보다 분명 더 나은 해가 될 거라고 했다.
사람 단순하기도 하지. 카톡 내용을 읽는 순간 '그래, 이번 주까지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보자'는 (현실도피성)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 일을 통해 글쓰기의 새로운 면을 공부할 수 있었으니 (설마) 돈을 떼이더라도 100% 손해만은 아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심각하다). 어쨌든 대기업이라니까, 대기업의 그녀를 조금 더 믿어보기로 했다. 아직은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선의를 믿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