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부터 얼마 전까지, 꾸준히 글을 의뢰하는 회사가 있었다.
사례자를 인터뷰하고 내용을 기사로 쓰는 일이었다. 원래 하던 방송 일이 아니라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9월 이후, 의뢰인과의 연락이 끊겼다.
9월은 의뢰인의 회사에 중요한 행사가 있는 달이었다. 부서의 모든 인력이 행사를 위해 총동원되었다. 나 역시 행사 내용을 뒷받침하는 기사 두 편을 의뢰받아 썼다. 행사는 무사히 끝난 듯했다. 기사 두 편에 해당하는 페이도 제 때 입금이 되었다.
9월은 짧은 시간에 두 편의 원고를 쓰고 다른 일까지 병행하느라 체력 소모가 컸다. 그래서 쥐고 있는 다른 일들도 조금 놓았다가 10월부터 다시 시작해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11월이 중반으로 치닫는 지금까지 의뢰인에게서는 어떤 연락도 없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회사와 사람처럼 한 순간 내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혹시라도 의도적으로 나를 피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서로 난감한 상황이 될까 봐 일단은 기다리고 있다.
의도적으로 나를 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의뢰인이 마지막 일을 제안할 때, 두 편의 기사 중 한 편이 속편 느낌이라 원래 받던 페이의 절반만 받고 써 줄 수 있느냐고 물어 왔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한두 번 보고 말 사이도 아니고 한 번 정도는 충분히 네고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흔쾌히 '그러마'라고 했다. 솔직히 그만큼 의뢰인과의 사이에 신뢰가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의뢰인 입장에서는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까? 게다가 그 후, 아예 원고료가 반값으로 굳어져 버렸다면?
프리랜서에게 일과 의뢰인은 마치 뿌리 없는 식물 '이오난사' 같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 곳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이 아니기 때문에 옮기기도 쉽고, 머물렀던 자리에 흔적을 남기지도 않는다. 먼지처럼 이리저리 둥둥 떠다니다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는 이오난사.
의뢰인이 사라져 버린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내 입장은 이렇다. 만약 이제라도 의뢰인이 다시 연락을 해 오면 일을 해야 할까? 감정을 배제하고 그냥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면 될까?
이 전의 나라면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사람이 나의 글을, 나의 노동을 얼마나 가치 있게 생각할까. 온전한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이면지 위에 몇십 번을 이리저리 써 보는 나의 노력을 얼마나 이해할까. 프리랜서에게 일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이런 이해와 배려를 바라는 건 나의 욕심이다. 그러나 나의 일을 이오난사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내가 이 일을 오래 지속하는 데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얼마 전 매너리즘에 빠져 하루하루를 흘려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 뿌리가 없는 이오난사 같은 일은 다시 일을 시작하고 지속하고 싶은 동기 부여를 전혀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인생을 더 허무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런 감정은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리하여 앞으로는 철없고 배부른 소리 같기도 하지만 먼지 같은 관계와 일은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나이가 들면서 나에게 주어진 기회가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하며 남은 시간을 살아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