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쓰고 있는 기획안이 있다.
전체 틀까지는 잡았는데 그 뒤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이 기획이 맞나?' 자신이 없기도 하고, 뭐든 시작은 거창하고 신속한데 포기 또한 신속한 '저질 끈기' 덕에 3주 전에 전체 틀 잡아 놓고 아직까지 잠정 휴업 상태다.
지금은 채널도 많고 OTT가 강세라 괜찮은 기획안만 있으면 바로 제작이 가능하지만('괜찮은 기획안'이 되기까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과정이 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라떼는 말이야~) 작가가 단독으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기획안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교양 파트는 새 프로그램이 잘 안 만들어지기도 하고 기획은 피디들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커, 작가가 단독으로 기획안을 쓴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작가 8,9년 차 즘, 지금의 금쪽이 방송의 원조 격인 육아 프로그램을 할 때였다.
4주에 한 편씩, 4명의 메인 작가가 돌아가면서 제작을 했는데 나보다 나이와 연차도 많고 예능과 교양을 두루두루 오가며 일하는 작가 언니가 있었다.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고 평소 친하게 지내는 부류의 작가도 아닌 터라 별로 말을 나눌 기회가 없었는데 그날은 사무실에 언니와 나 단 둘만 있었다.
자연스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언니가 기획안을 쓰고 있다고 했다.
지금도 언니가 보여준 기획안의 일부가 선명히 기억이 난다.
이태원을 소재로 한 도시 기행 기획안이었는데 그걸 보는 순간 (내용과 별개로) 굉장히 놀랐던 나도 기억난다.
'작가가 기획안을 쓴다고? 파일럿을 준비 중인 것도 아닌데 혼자서 그냥 쓴다고?'
한편으로는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지?라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한 나와 달리 언니는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면 작가는 두 부류로 나뉜다고 했다. 기획안이 있는 작가와 없는 작가. 그리고 오래 살아남는 작가는 기획안이 있는 작가라고 했다.
KBS, MBC, SBS, EBS가 방송국의 전부였던 그때는 기존 프로그램만 잘 유지해도 충분히 안정적인 시청률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괜히 무리하게 새 프로그램을 기획해 기존 프로그램을 없앨 이유가 없었다. 나 역시 그때는 언니의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만에 세상은 칼로 무를 자르듯 급격하게 변했다.
아무리 오래된 프로그램이라 해도 시청률이 나오지 않으면 바로 간판을 내리는 시대가 되었다.
작가의 몸값도 연차가 쌓이면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월급이 아니라 스스로 올리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기획을 할 수 있는 작가냐, 아니냐는 몸값을 올리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8,9년 전 언니는 미래를 정확히 내다볼 줄 아는 작가였다.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배우는 존재라고 지난봄, 프로그램 제작에서 한 발 물러나 기획만 하던 때가 있었다.
조금 느슨한 회사원처럼 오전에 출근해 대표님이 쓰라고 하는 기획안을 쓰고, 쓰고, 또 쓰고.
다행히 그중 몇 개는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마지막에 회사를 찜찜하게 나오기는 했지만 그때 기획안을 쓰던 경험은 '교양 작가가 무슨 기획안이야?'라는 안일한 생각을 바꾸는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이번 기획안도 그때, 그 시간을 지나오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완성이 될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무기력에 빠져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고 있었는데.
기획안이라는 것을 쓰다 보니 하고 싶은, 해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생겼다.
뭐라도 하다 보면 어디에라도 닿고 뭐라도 될 수 있다는 말, 다시 한번 믿어보고 싶은데...
이 기획안을 완성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