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평화롭게 대화하는 법

by 곽준원

마셜 로젠버그의 비폭력 대화는 갈등 상황에서도 상대를 공격하지 않고, 사실, 감정, 욕구, 요청의 순서로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대화 방식입니다. I-Message (나 전달법)이라고 합니다.


로젠버그는 우리가 관계에서 상처를 주고받는 이유를 "넌 왜 맨날 그래?", "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라는 대화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런 말은 상대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상대를 문제의 책임자로 세워 버립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자연스럽게 방어, 반격, 침묵의 악순환을 시전 합니다. 반대로 비폭력 대화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내 말을 끊었을 때(사실)
저는 서운하고 무시당한 느낌이 들었어요(감정)
저는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래요(욕구)
다음에는 제 말이 끝날 때까지 한 번만 들어주시면 좋겠어요(요청)


즉, '네가 문제야'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느낀다'로 말의 초점을 옮기는 순간, 상대방은 더 이상 공격받는 느낌보다 '아. 이 사람이 지금 이렇게 느끼고 있구나'에 집중할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난 그냥 사실만 말한 건데요?"에서 시작된 오해들

요즘 MBTI가 유행입니다. 저는 'T' 성향을 다분히 지니고 있습니다. 한때 저는 '감정보다는 상황을 인식하고 팩트만 말하는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상처를 받았다고 하면 속으로 '아니.. 나는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왜 상처를 받지?'라며 속으로 반박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제가 했던 말속에는 "넌 왜 자꾸 약속을 안 지키냐", "왜 이렇게 준비를 안 해", "그 정도는 다들 하는데. 왜 그게 안돼?"라는 문장들이 자주 들어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상대방은 당연히 발끈합니다. "항상은 아니잖아요", "저번에는 제가 다 맞췄잖아요"라는 말을 들으면 저도 서운해집니다. '나는 도와주려고 한 말인데, 왜 이렇게 방어적이지?'라는 생각이었고, 전혀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습니다.


저의 말은 사실(팩트)이 아니라, 상대에게 낙인(라벨)을 붙이는 You-Message였습니다.


"너는 항상..." 대신 "나는 지금..."

I-Message(나 전달법)을 처음 책에서 알게 되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나는 ~했을 때, ~라고 느꼈고, ~을 원해요"였습니다.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우습게 느껴지더군요.


'이런 한 문장으로 뭐가 달라질까'라며 자기 계발 서적에 냉소를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 대입해 실천에 옮겼을 때 그 결과는 생각보다 위력이 컸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 후임이 자료를 늦게 보냈을 때 예전의 저는 "넌 왜 항상 이렇게 늦게 보내? 네가 자료를 보내야 내가 다음 일을 할거 아냐"라면서 쏘아붙였습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섞여 있습니다.


"넌 항상 늦는다"라는 말은 성격, 습관에 관련된 평가이고, "나도 피해자다"라는 메시지는 책임 전가와 비난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은 후임의 표정은 대개 입술이 굳고, 눈이 살짝 가늘어지고, 어깨가 움찔거립니다. 비폭력 대화법을 알게 된 이후에는 앞선 대화와 다르게 I-Message로 변경해서 말해 보려고 시도했습니다.


"오늘 자료가 마감 시간보다 30분 늦게 도착해서 조금 조급해지고 불안했어. 내가 이걸 정리해서 다시 올려야 하거든. 다음에는 마감 시간 최소 30분 전에 보내주면 좋겠어."


똑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말을 하고 난 뒤 제 기분부터가 달랐습니다. "넌 왜 항상 그래?"라고 쏴버릴 때 느껴지는 찝찝한 죄책감 대신, "내가 왜 힘들었는지"를 솔직하게 공유했다는 가벼움이 생겼습니다. 물론 상대방의 반응도 달라졌습니다.


"아. 선임님 일정까지는 생각을 못 했네요. 다음부터는 꼭 30분 전까지 자료를 공유하겠습니다."


이때 처음 비폭력 대화의 강력함을 느꼈습니다. 내가 예민해서 싸움이 나는 게 아니라, '너'를 주어로 말해서 서로 기분이 상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요.


감정을 구체적인 말로 바꾸는 연습

I-Message를 써보려고 하면 막히는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기분이 나빴어요."

"나는 조금 별로였어요."


막상 써보면 감정 표현이 늘 이렇게만 반복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이 감정 언어 구체화입니다. 기분이 나쁘다는 표현보다는 '서운했다', '억울했다', '무시당한 느낌이었다', '부끄러웠다'로 바꿔보는 편이 좋습니다. 자주 쓰는 표현인 짜증 난다보다는 '답답했다', '혼자 떠안은 느낌이었다', '지쳐 있었다'처럼 표현을 세부적으로 해보면 더욱 전달에 효율이 올라갑니다.


예전 직장 동료에게 "아까 회의에서 기분이 조금 나빴어요"라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동료는 잠시 멈칫하더니 반문했습니다. "어떤 점이요? 화난 건가요? 아니면 서운한 건가요?"


그때 저는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기분 나쁜 덩어리'만 품고 있었지, 그 안에 어떤 색의 감정이 섞여 있는지 스스로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의식적으로 감정 어휘를 늘려보고 느낀 감정을 대입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화가 날 때 정말 분노인지, 아니면 서운함인지, 혹은 무력감인지 살펴보고, 속상할 때 인정받고 싶었는데 무시당한 건지, 함께하고 싶었는데 소외된 건지 차분히 감정을 쪼개 보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I-Message의 전달력이 강력해집니다.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는 화법을 사용하면 상대방도 '공격받은 사람'이 아니라 '상대의 진짜 마음을 듣는 사람'이라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싸움을 줄인 건, 논리가 아니라 문장의 주어였다

집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도착했더니 싱크대에 설거지가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몸은 피곤하고 머리는 이미 깨질 듯이 아픈데 싱크대 앞에 서는 순간 속에서 '아내는 집안일을 왜 이렇게 안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에 간신히 문장을 바꿔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나 오늘 회사에서 많이 지쳐서 왔는데, 싱크대에 그릇이 많이 쌓여 있는 걸 보니까 순간 불편함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어.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모습을 보니까 답답한데 조금만 나눠서 빨리 설거지하면 안 될까?"


단어를 바꾸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방향은 꽤 많이 달라졌습니다. "너 왜 안 해?"라는 말은 과거에 대한 비난이고, "나는 지금 힘들고 불편해. 지금 함께 해 줬으면 좋겠어"라는 말은 현재의 상태와 구체적인 요청입니다. 당연하게도 아내의 반응도 달라졌습니다.


물론 항상 이상적으로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저도 감정이 너무 치솟는 날은 I-Message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아. 진짜 왜 이렇게 해놨어?"라고 쏘아붙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적어도 한 번씩은 되짚어 보려 애쓴다는 것입니다.


야구에서는 3할 정도의 타율이면 꽤 훌륭한 타자라고 부릅니다. 10번 중에 3번을 홈런이나 안타를 친다는 뜻입니다. I-Message도 이와 유사합니다. You-Message로 보통 대화를 했었다면 I-Message로 대화를 변환하는 타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힘을 쏟는다면 충분히 할만하지 않을까요.


I-Message는 '나만 옳다'가 아니라, '나부터 책임지겠다'에 가깝다

I-Message를 <상처 주지 않는 대화>라는 책에서 처음 알았을 때 제가 느꼈던 오해 중 하나는 '계속 내 위주로 말하면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건 아닌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I-Message를 써보면 나만 옳다고 주장하는 언어가 아니라, '내 감정의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지 않는 언어'에 가까웠습니다.


예를 들면 You-Message는 "너 때문에 열받았어"이고, I-Message는 "나는 방금 그 말을 들었을 때, 모욕당한 느낌이 들었어."입니다. 전자는 '내 감정의 원인은 너'라고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내 감정을 설명하되, 이 감정을 느끼는 주체는 나'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렇게 대화하면 내가 내 말을 듣기에도 덜 창피합니다. 나는 더 이상 '상대를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을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위치에 서게 되니까요.


사실 타인의 감정은 통제 불가능한 영역에 속합니다. 내가 이러한 감정을 느꼈다고 전달해도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 우리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I-Message 대화 이론에서 통제 가능한 영역은 자신의 감정뿐임을 강조합니다.




I-Message를 쓴다고 해서 모든 관계 갈등이 사라지는 이상적인 현실이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달라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너는 왜 그래?"라고 외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나는 지금 이렇게 느끼고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자는 상대방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만들고, 후자는 나와 상대가 같이 상황을 바라보는 자리에 서게 합니다.


그래서 감정 표현은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깊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예전의 저는 '말을 아끼는 게 관계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공격적인 말을 줄이고, 책임 있는 감정 표현을 늘리고, '너'가 아닌 '나'를 주어로 말하는 연습. 그 작은 전환이 내 감정을 다루는 방식과 내 곁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바꿔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글을 다 읽으신 뒤에 혹시 최근에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지만 참았던 말이 하나 있다면 종이에 이렇게 한 번 적어보면 어떨까요.


"나는 ___ 했을 때, ___라는 감정을 느꼈고, 그래서 ___ 을(를) 원했어요."


그 문장을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마음속에서만 맴돌던 말이 조금은 안전한 형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미 I-Message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라고 믿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mindunfold


#심리치유 #비폭력대화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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