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도서를 읽다 보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말로 정확히 이름(라벨링) 붙이는 것만으로도 뇌에서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문장을 발견합니다. 감정을 이름 없이 막연한 덩어리로 느낄 때는 편도체가 강하게 반응하지만, '아. 지금 불안하구나.', '난 지금 서운하구나'처럼 감정에 언어를 붙여주는 순간 편도체의 반응이 줄어들고, 이마 쪽의 사고, 조절과 관련된 영역인 전두엽이 더 활성화된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습니다.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다 처리되지 않고, 그 감정을 인식하고 말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감정이 정리 및 완화되며, 감정 어휘가 풍부할수록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고, 감정에 덜 휘둘리는 경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냥.. 복잡해요"로는 아무것도 풀리지 않습니다.
"요즘 기분이 어때요?"
누가 이렇게 물으면 저는 "음. 글쎄요"라며 항상 비슷하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하거나 딱히 어떤 말로 설명이 되지 않아서 '글쎄요'라는 대답이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이렇게 말해도 속으로는 이상한 찝찝함이 남았습니다.
'분명히 마음 어딘가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게 있는데, 막상 말로 꺼내려면 왜 이렇게 막히는지.. 쩝'
회사에서 스트레스가 쌓인 날이면 집에 와서 괜히 말수가 줄어들고, 주말에 약속이 취소되면 하루 종일 멍하니 폰만 만지작거리면서도 '그냥. 좀 별로야'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옆에 있는 사람들도 제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상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들어?"라고 물어보면 "아니.. 그냥 잘 모르겠어"라는 답변이 나오면 대화는 늘 여기서 끝났고, 그 뒤로는 각자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감정 공부를 하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냥 복잡해요', '그냥 모르겠어요', '음. 글쎄요'라는 말들이 제 감정에 뚜껑을 씌우고 있었다는 걸요.
어느 날 감정 표현과 관련된 책을 읽다가 "나는 지금 [감정 단어]을 느껴요. 왜냐하면 [상황/맥락] 때문이에요"라는 문장을 만났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 단순해서 처음에는 솔직히 가볍게 넘어갔습니다. '이런 문장이 틀이라고까지 봐야 하나? 굳이 이렇게 말해야 하는 건가?' 싶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해 봤습니다. 나는 정말 '그냥 말하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동안 해왔던 말 뒤에 늘 숨는 사람인가?
그래서 한번 노트에 오늘 하루를 이 문장 구조에 끼워 맞춰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기가 너무나 힘겨웠습니다. 상황을 떠올려봐도 제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감정 불구자가 된 듯 감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책을 다시 펼쳐서 저의 상황과 비슷한 사례를 찾아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읽고 난 후에야 노트에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지치고 허탈한 감정을 느낀다. 왜냐하면 저녁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서 개발한 사람은 나 혼자였기 때문이다."
"음. 글쎄요', "그냥 복잡해요"라고 퉁 쳐버렸다면 한 줄도 안 나왔을 문장이 틀 하나를 잡고 나니 생각보다 자세하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하나 벌어졌습니다. 글을 써놓고 읽어보니 방금 전까지 목덜미를 누르던 어떤 덩어리가 조금은 작아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함께 하는 프로젝트에서 혼자 분투하던 모습에서 허탈한 감정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 문장은 비로소 제 감정을 제 눈으로 보게 해 주었습니다.
"기분 나빴어요" 말고, 그 안쪽을 들여다보려면
그 후로 저는 의식적으로 '기분이 나빴다'라는 표현을 자제하려고 했습니다. 어떤 날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개발을 진행하는 도중에 이런저런 기능을 추가하면 괜찮을 듯하여 아이디어를 꺼냈습니다. 시스템 구현이 어느 정도 끝나고, 아이디어와 관련된 내용을 야근까지 하면서 기획서를 작성하여 담당자와 리더급에게 메일로 공유했었습니다.
그런데 피드백이 며칠이 지나도록 오지 않아서, '괜히 쓸데없이 일을 했나'라며 기분이 상한 적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일하면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지냈지만, 퇴근길 지하철에서 메일을 받았던 사람과 대화 나눈 일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예전 같으면 '아이디어와 관련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아서 기분이 나빴다'라고 정리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날은 감정 문장으로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나는 지금 서운하고, 존중받지 못한 느낌이다. 왜냐하면 야근까지 하면서 열성적으로 아이디어를 공유했지만, 아무 반응도 없이 며칠을 보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기분 나빴다'라는 말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던 감정의 결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단순한 화가 아니라, '내 의견을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은 것은 같은 서운함', '내 노력이 인정받지 못한 것 같은 허탈감', '차라리 기획서를 쓰지 말걸 하는 위축감'이 뒤섞인 느낌이었습니다.
감정을 문장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과정이 결국 감정을 해부하는 과정과 동일합니다. 이런 연습을 여러 번 하고 난 후 저의 감정 어휘 노트에는 '서운함, 허탈함, 위축감, 존중감, 인정 못 받은 느낌' 같은 단어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감정을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정리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거나 잠을 자고 나면 괜찮아지리라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 날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직장에서 발생한 억울했던 일을 참고 넘어가면 퇴근 후 집에 와서 별것 아닌 말에 아이에게 화를 내는 일이 생기기고 했고, 친구에게 서운했던 일을 직접 말하지 못하고 며칠 뒤, 단체방 톡의 알림만 울려도 이유 없이 기분 나쁜 감정이 올라오곤 했습니다.
속으로 삼킨 감정은 언제까지나 조용히 있지 않았습니다. 말이나 글로 정리되지 않은 채 몸과 행동으로 튀어나옵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몸과 마음에 머문다'라는 문장이 유난히 크게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짜증이 정말 지금 상황 때문인가? 아니면 며칠 전부터 쌓였던 말로 못 풀었던 감정이 섞여 있는 건가?'를 꼭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매번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고, 여러 번 불편한 상황이 쌓이고 쌓여서 한꺼번에 별것 아닌 일로 폭발하는 성향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화가 폭발하는 경우에는 상대방도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관계가 더욱 악화되는 지름길이 바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태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트에 써본 감정 문장 하나
감정 문장을 실제 관계에 꺼내 쓰는 건 노트에 혼자 쓸 때보다 몇 배로 훨씬 어렵습니다. 감정이 순간 올라오면 편도체가 활성화되고 전두엽의 기능은 약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조용히 글을 쓰거나 말로 표현할 때는 이미 편도체가 안정화되고 전두엽은 활성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느 날 주말 아침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2026년도에 고등학생이 되는 아들이 약속했던 시간보다 훨씬 늦게 일어났고, 별말 없이 핸드폰을 보고 잇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야. 너는 왜 매번 약속을 지키지 않냐?"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실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아빠는 약속한 일에 기대를 많이 했는데 아쉬워"였는데, 입 밖으로 나온 건 비난 섞인 한 마디였습니다. 그 말이 던져진 순간, 아이는 얼굴이 굳어 버렸습니다.
"아니. 어제 늦게 자서 피곤해. 귀찮아"라는 아이의 말에 저도 바로 방어가 올라왔습니다. "아니. 아빠랑 약속했잖아. 귀찮다고?" 입은 다물고, 마음은 문을 쾅 닫고 싶은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의 방어기제를 매우 강력하게 발동하여 며칠 동안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예전에 읽었던 감정 표현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아주 어색한 마음으로 아이에게 말을 꺼내 봤습니다.
"아빠는 함께 하는 무언가는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데, 함께 하는 사람이 그런 반응을 보이면 서운하고, 무기력해져." 말을 하면서도 침울한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는 회의감과 그래도 한 번은 제대로 말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표정이 조금 느리게, 하지만 분명히 바뀌었습니다.
"응. 아빠 미안. 그날은 진짜 피곤해서 나도 정신이 없었어. 다음부터는 아빠하고 약속하면 잘 지키려고 노력해 볼게" 같은 상황인데 약속을 지키지 않냐라고 비난할 때와 서운하고 무기력했다고 말했을 때 대화의 방향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그날 밤 저는 혼잣말처럼 생각했습니다. '아.. 내 감정을 평소에 잘 조절하려면 문장으로 만드는 연습을 정말 꾸준히 해야겠구나. 결국 싸움을 줄이는 기술이네'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감정 문장 쓰기. 제법 도움이 되는 습관
하루에 하나의 감정 표현 문장 쓰기라는 실천 과제가 워크북처럼 되어 있는 책들도 있습니다. 저는 이걸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는 조금 저의 방식으로 바꾸어 보고 있습니다.
특정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 상황에서 느낀 감정을 노트에 단어 위주로 짤막하게 적습니다.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그때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는지 말이죠. 그리고 퇴근길 지하철이나 잠들기 전에 간략하게 한 문장으로 구성합니다.
"오늘 나는 ___한 상황에서 ___한 감정을 느꼈다. 왜냐하면 ___ 때문이었다."
상황이 벌어지고 난 이후에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정확하게 재생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상황이 벌어지고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메모하는 편이 나중에 기억하기 훨씬 유리합니다.
메모를 토대로 하루에 한 줄, 길어야 세 줄 정도 쓰다 보면 하나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특히 예민해진다거나, 혼자 있을 시간이 없으면 의기소침해진다거나, 누군가와 대화하는 중간에 끊어지면 불쾌감을 느끼는지 조금씩 자신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결국 감정을 문장으로 풀어내는 일은 내가 가진 욕구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서 감정이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말을 바꾸면 감정을 다루는 방식도 달라진다
이제는 누군가가 "요즘 어때요?"라고 물으면 "그냥. 잘 지냅니다"라고만 답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물론 여전히 한마디로 정리하기 애매한 느낌은 남아 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최근에 어떤 감정을 주로 느끼는지 한 단계 더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요즘은 불안과 기대가 같이 공존하는 상태인 것 같아요. 새로 시작하는 일이 잘 될까 걱정도 되는데, 한편으로는 오랜만에 저의 역할이 확대되는 걸 도전하는 거라서 조금 설레기도 해요."
이렇게 말하는 그 순간에는 자신에게도 메시지가 전달됩니다. '나는 불안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설렘을 같이 안고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말이죠.
감정을 말로 풀어내는 연습은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결국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성을 기르는 연습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마음에 한 번도 문장으로 적히지 않았던 그 감정들을 조금씩 말로 옮겨보는 과정을 통해 감정은 더 이상 나를 휘두르는 괴물이 아니라, 천천히 이해해 볼 수 있는 서사가 되어 줍니다.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혹시 감정의 언어를 글로 써보고 한 번 육성으로 읽어보면 어떨까요. 처음에는 분명 어색할 겁니다. 저도 여전히 어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 줄의 문장을 적고 말로 옮겨보는 순간 감정은 막연한 덩어리에서 이해 가능한 언어로 한 걸음 옮겨온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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