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밥이 전해준 쏠쏠한 귀띔
나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신세계에 대한 무지(無知) 상태는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중학교 1학년 시절이었다. 교내 방송반 부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할까, 말까 망설였다.
‘이걸 해? 말아? 시험이 어려우면 어쩌지? 지원했는데 떨어지면 개망신이잖아?’
나 스스로 시작한 도전에 대한 도전은 대부분 스스로 회수했다. 해보지도 않고 뒤로 돌아섰던 것이다. “저 포도는 신 포도야.” 마치 따먹지 ‘못한’ 핑계를 대는 여우처럼 말이다.
이런 사고와 행동 방식은 십대를 지나 성인이 되면서 습관으로 굳어졌다. 대학 가라니까 가고 취업해야 한다니까 하고. 중간, 기말을 치고 토익 점수를 높이는 등 그저 코앞에 닥친 현실만 급급하게 처리했다. 이 과정에서 마주친 다채로운 도전들을 스스로 외면했다.
그 결과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에 쓸 주제가 없고 면접 때 어필할 건더기가 없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 삶을 이끌어갈 주체적인 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별거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문을 열면 펼쳐질 새로운 세계는 별거 있으리라 여겼다. 그리고 ‘특별한 무언가’인 별거를 얻기 위해서는 귀찮은 어려움이 따라올 것 같았다. 즉, 나는 피곤을 무릅쓰고 성가신 일을 할 텐데. 대체 내가 왜 수고스러움을 감내해야 하는지, 성공도 보장할 수 없는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지금보다 어렸던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어린 나야, 참으로 안타깝다.) 아무튼 학생, 불쌍한 취준생, 불행한 직장인이었던 나는 신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었다.
2021년 현재의 나는 학교라는 울타리로 보호받는 학생도 아니요, 신용 대출을 척척 받을 수 있는 회사원도 아니다. 이따금씩 직업란을 클릭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어떤 걸 선택할지도 모르겠고, 내 이름 석자만으로는 돈 나올 구석이 하나 없는 일개 사람일 뿐이다. 뭐 하나 좋은 게 없어 보이는데, 그럼에도 과거보다 나아진 걸 찾아보면? 아! 나를 침체시킨 두려움도 함께 없어졌다는 점이다.
이런 스펙을 가진 내가 최근 약밥을 만들었다. 불린 찹쌀에 대추, 밤, 견과류 등을 넣고 쪄낸 전통 음식, 옛날 결혼식 때 한상 차림 후식으로 꼭 나오던 혼례 음식, 할머니가 참 좋아하시던 약밥을 말이다. 약밥을 만든 이유를 기억해보니 신혼 시절이 떠올랐다. 결혼 후 아주 오랜만에 약밥을 먹었다. 특별한 날 한 번씩 맛봤으니 꽤 자주 마주쳤다. 약밥을 보면서 처음에는
'이런 요리는 어떻게 만들까, 신혼 애송이인 내가 범접할 수 없잖아?'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약밥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 왠지 나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그냥 따라 하면서 나는 약밥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
많이 어렸던 나에게 약밥 만들기 도전이 주어졌다면 ‘나는 못해. 그냥 사 먹고 말자.’라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떤 선택을 할 때 지난 이십 년간 도전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를 떠올린다. 고민이 길어질수록 반복적으로 끌어올려본다. 그리고 끝내 외친다.
“약밥이 뭐, 별거 있어?”
해보면, 막상 문을 열어보면 정말 별것 없다. 재료를 계량하고 순서에 따라 진행하면 된다. 전기밥솥은 필요하다.
이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써보자면.
찹쌀은 종이컵 2컵 분량을 물에 담아 4시간 동안 불리고 그 사이 밤, 대추, 호박씨, 건포도 등을 준비한다.
대추씨를 발라 물 700ml와 함께 끓는 물에 20분 정도 우려내고 우린 물 400ml 정도에 진간장 세 숟가락, 흑설탕 여섯 스푼 정도 넣어 간을 한다.
불린 찹쌀의 물기를 빼고 전기밥솥에 담고 준비한 다른 재료도 위에 올린 후 간장과 흑설탕으로 간을 한 대추 물을 종이컵 1컵 반을 넣어 백미 취사를 누르면 된다.
약 25분 정도면 재료가 익는다. 뜨끈뜨끈한 약밥 위에 참기름 한 숟가락을 넣고 골고루 저어준다. 한 김 식힌 후 대추 고명을 올리면 근사하게 완성된다.
적절한 재료가 준비되고 계량에 신경을 쓴다면 약밥 만들기는 더 쉬워진다. 내가 잔치음식을 만들다니! 뿌듯함도 느낄 수 있다. 특별한 날을 꾸미는 모던한 식탁에도 제법 잘 어울린다. 직접 완성하면 맛도 더 좋다. 그래서 약밥은 만들수록 기분이 좋아진다.
보통 요리를 하면 잡다한 생각이 무작위로 피어오르기 마련인데, 심지어 약밥은 나에게 쏠쏠한 귀띔을 해준다.
도전을 하면서 실패 따윈 생각하지 말아라.
살면서 아주 큰 성공이나 실패는 거의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마라.
네가 도전하는 대부분은 삶을 영위하는데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것, 그걸 놓치지 말아라.
그게 별거라면 별거겠다.
그럼 나는 맞장구를 친다.
“혹, 약밥을 만들다가 망하면 다시 만들면 되잖아? 까짓것 그게 대수냐!”
2021년 현재. 나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문 앞에 서 있고, 서있을 것이다. 내 이름 석자로 그냥저냥 살기에는 상상만으로도 밋밋하다. 내 삶이 어떤 세계로 어떻게 펼쳐질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렸음을 이립이 훨씬 넘어서야 깨달았다. 이런 이유로 나의 신세계가 글이든, 음식이든, 아직은 모르는 어떤 모험이든 나는 문부터 열어 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