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샘달 엿새 Dec 27. 2021

돈을 주고서라도 사고 싶던, 그 여유

둘째 부모가 가진 여유의 원천


첫째와 인사하는 사이, 둘째가 신생아실에서 나를 찾았다. 급한 마음에 아기를 보러 뛰어갔다. 둘째는 배냇저고리를 곱게 입고 속싸개로 짱짱하게 둘러 있었다. 새초롬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치 ‘엄마, 맘마 주세요.’라며 말하는 것 같았다.


“귀염둥이!!!! 이렇게 예뻐도 되는 거야???”


나는 둘째를 안자마자 아기에게 별소리를 다해가며 내 방으로 데려왔다. 아기는 내 방에서 맘마를 먹으며 잠이 들었다. 둘째가 잠든 모습을 보며 첫째 생각을 하니 내가 처음 엄마가 되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할 수만 있다면, 돈을 주고서라도 사고 싶었다. 둘째 엄마들의 ‘여유’를 말이다.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내가 만났던 둘째 엄마들은 나와 달라도 정말 많이 달랐다. 나는 그들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2017


봄을 시샘하는 바람이 불었다. 진통은 계속되었지만 차도가 없었다. 더 이상 줄 힘도 없고 졸음이 쉴 새 없이 몰려왔다. 결국 예정에 없던 수술실에 들어갔다. 처음 보던 공간과 차가운 바람이 맨다리를 쉴 새 없이 떨게 만들었다. 허리를 누르는 진통과 태동이 겹치면서 정신이 몽롱해졌다. ‘부디 무사히 만나자’라며 기도했다. 눈을 뜨니 남편이 곁에 있었다. 아기 건강하게 잘 태어났고 몇 kg이라고 조금 있으면 면회한다고 소식을 전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남편이 찍어준 아기 사진을 계속 바라보며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소변줄을 빼고 첫걸음을 떼는 순간, 창자가 쏟아질 것 같은 통증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이도저도 못하는 아픔에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매달린 채 복도를 걷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신생아실 앞에 도착했다.

 

“우리 애기 저기 있네.”


남편이 알려준 대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아기는 사진 속 모습보다 훨씬 작았다. 꼬물꼬물 열심히 움직이는데 왠지 모를 눈물이 앞을 가렸다.


‘저렇게 작은 몸으로 숨을 쉬고 몸을 움직이는구나. 엄마는 잘 걷지도 못하는데 널 제대로 안아줄 수 있을까. 그런데 내가 엄마라고?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코로나가 없던 시절. 신생아실 아기는 원할때면 비교적 편하게 만날 수 있었다. 수술 3일 차부터 팔에 휘감은 주삿바늘을 제거하고 수유를 시작했다. 우리 아기와 첫 알현을 앞두고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곧 간호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아기를 안아봤다. 나는 우리 아기가 내 힘으로 부서질까 봐 덜덜 떨었다. 고작 내 팔뚝만 한데 엄마인 나는 아기를 제대로 안지도 못하고, 그냥 분유를 먹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밤낮 없는 수유 전쟁의 서막이 열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초유를 먹이겠다고, 영혼까지 끌어 모으는 열정으로 아주 조금씩 모유 기술을 늘렸다. 그리고 조리원으로 옮겼다.



조리원 수유실은 병원보다 넓었다. 산모도 아기도 많았다. 그래서 산모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생겼다. 여전히 어색한 수유 시간이었지만 엄마들을 관찰하고 대화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무엇보다 둘째 엄마는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둘째 엄마는 아기를 안는 모습부터 다르다.


초산모는 아기를 안는 모습부터 티가 나기 마련이다. 작디작은 아기가 부서질까 봐 노심초사다. 특히 아기가 울 때는 엄마 멘탈은 나간다. 그러면 초산의 나는 간호사실 호출벨을 힘차게 눌렀다.


“아기가 너무 울어요. 도와주세요!!!”


나의 호들갑과는 달리 둘째 엄마들은 안정적으로 아기를 안는다. 심지어 아기도 안 운다. 엄마 품속에서 쿨쿨 편안히 잠든다. 멋진 그녀들은 혹여나 아기가 쉬를 했는지 직접 기저귀를 확인한다. 세상에, 나는 기저귀 가는 법도 안 배웠는데. 어떻게 저걸 척척해내는지 존경스러웠다.  



둘째 엄마들은 첫째도 살뜰히 챙긴다.


수유에 집중하는데 갑자기 둘째 엄마의 전화벨이 울렸다. 영상통화였다. 둘째 엄마는 주변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집에 있는 첫째였다. 밥은 먹었는지, 어린이집은 잘 다녀왔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꼼꼼히 체크했다. 그러면서 둘째에게 모유를 계속 먹였다. 어쩜 저리도 멀티 태스킹을 해내는 건지. 둘째 엄마들의 모습은 나에게 매일, 매 순간 놀라움 자체로 다가왔다.



둘째 엄마들은 깨알 육아 정보가 많다.


나는 집에 가는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육아에 대한 불안함이 극에 달했다. 당장 집에 가면 어떻게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지, 울면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하나도 못 할 것 같았다. 수유실에서 둘째 엄마들을 만나면 궁금한 걸 하나씩 물어봤다.


“BCG? 그게 뭔가요? 어디서 맞아야 해요?”

“아기 머리 감기고 말려야 돼요??”

“비판텐이 뭐예요???”

“예방 주사 맞으면 열나요????”

“몇 도부터 고열인가요????? 응급실로 뛰어가면 되나요?????”


역시 멋진 그녀들은 내 질문에 하나씩 대답을 해주셨다.

BCG는 일반 소아과에서 맞아도 되는데 피내용을 맞기 위해서는 예약(당시에는 보건소)을 해야 한다, 아직 추운 날씨인데 목욕하고 아기 머리 안 말리면 춥다, 손수건으로 말려도 숱이 없어 금세 마른다, 비판텐은 기저귀 발진 때 많이 쓰고 접종하면 열 나는 유명한 주사가 있다. 등등. 참으로 친절한 척척박사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많이 의지하던 둘째 엄마가 퇴소하는 날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몇 마디 나누다가 나도 곧 집에 가는데 육아를 제대로 못 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내 말에 그녀는


닥치면 다 해요.


라며 무척 간단하고도 강력한 명언을 남겨주셨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자.


① 닥치면? 뭐가 닥친다는 것인가? 이런 불확실한 단어가 있나.

② 다 해? 뭘 또 다 한다는 건가? 이건 더 추상적이잖아.


모쪼록, 나는 이 말을 기억하며 집에 왔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서든 해결하게 될 거라는, 비장한 마음을 함께 챙겨 왔다. 아기와 함께하는 첫날부터 현실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매일 모든 순간이 무언가가 닥침의 연속이었고 우리 부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또 해냈다. 그러다 우리는 둘째를 낳았다.



2021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새벽이 되자 요란한 소나기와 천둥번개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른 아침 캐리어를 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분만실 앞에서 이름을 얘기하고 입장했다. 병원복으로 갈아입고 대기실에 누웠다. 간호사 선생님이 팔에 주삿바늘을 꽂아주셨다.


‘이 정도면 뭐, 별로 안 아프네.’라는 생각으로 수액을 맞았다.


수술 예정이었던 9시가 다가왔다. 남편이 내 머리에 수술 모자를 씌워줬다. 간호사 선생님을 따라 수술실로 향했다. 아직 못다 한 말이 떠올라서 뒤로 돌아 남편에게 외쳤다.


“영상 많이 찍어놔! 최대한 많이!”


남편은 보이지 않았고 어느새 수술실 앞에 도착했다. 높고 좁은 수술대 위에 올라가 무릎을 가슴에 최대한 붙이는 새우 자세를 취했다. 간호사 선생님과 마취과 선생님의 상냥함에 마음이 놓였다. 어느새 잠이 들었고 내 담당 선생님 목소리와 아기 울음이 들렸다. 내 옆에 아기를 잠시 데려다 주신 걸 확인하고 다시 잤다. 눈을 떠보니 남편이 곁에 있었다. 몇 번이나 아기 몸무게를 물어봤고 수술이 잘 되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영상을 많이 찍었는지 물어봤다.


‘잘 찍어 놨군. 이 정도면 됐어. 굿굿’


흡족한 마음으로  번이나 우리 아기를 지켜봤다.  태어났고 건강하다니 참으로 감사했다. 우리 첫째에게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아침에 일어나 씩씩하게 배웅했는데 막상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는지 엉엉 울고 있었다. 이걸 어찌하나 싶었는데 내가 더욱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방법 뿐이었다.


“엄마 수술 잘 끝나서 이렇게 눈 떴잖아. 오늘 밤에는 물도 마시고 내일은 엄마가 걸을 수 있어. 엄마 걷는 모습 보여줄게.”


내가 멀쩡한 걸 확인하고 첫째는 비로소 울음을 그쳤다. 첫째 낳았을 때 멋져 보였던 둘째 엄마들은 집에 있는 첫째 걱정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그리고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비로소 그 마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수술 24시간 후 소변줄을 빼고 걸었다. 첫째 때의 통증이 너무 강력해서 솔직히 가장 무서운 영역이었는데, 이번에는 별로 안 아팠다. 밤새 발로 운동을 하면서 워밍업을 해서 그런지 직립이 수월했고 누군가의 부축 없이도 혼자 걸을 수 있었다. 남편은 집에서 첫째를 봐야 했으니 나 혼자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물도 뜨러 가고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회복 운동을 조금씩 했다.



팔을 감았던 주삿바늘을 빼고 마사지 실에서 연락이 왔다. 산후 마사지를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시간에 맞춰 장소에 도착했다. 마사지를 해주시던 분은 나에게



“둘째 엄마죠?”


라고 물으셨고,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니


“둘째 엄마는 복대를 안 하세요. 그런데도 잘 걸으시더라고요. 호호호.”


하며 재미있게 마사지를 해주셨다.



복대 귀찮아서 안 했는데. 그냥 걸어도 될 것 같아서 안 한 건데 이런 차이가 있다니. 우습기도 하고, 4년 전 선망했던 그녀들처럼 내게도 다름이 느껴진 건가 싶기도 했다.



조리원으로 옮겼다. 코로나 시대라 각방에서 수유를 하느라 산모들을 만나지 못했다. 수유 콜이 오면 신생아실로 가서 아기를 데려왔다. 오며 가며 지나치는 산모들을 보며 누가 첫째 엄마인지는 알 것 같았다. 4년 전에는 신생아실 아기들이 모두 비슷해 보였는데, 둘째 엄마가 되니 신생아 얼굴을 구분할 줄 알았다. 그리고 우리 아기는 몇 미터에서 떨어진 콧구멍만 보고도 알아차릴 정도의 짬!이 생겼다.



이런 소소함은 차치하고 둘째 엄마가 되어 얻은 가장 큰 무기는 아기의 성장별로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모유 안 먹으면 빨리 완분(완전 분유만 먹이는 수유) 진행하자. BCG 피내용을 맞히고 싶으면 예약을 알아보고, B형 간염은 따로 맞히자. 2개월 폐구균 접종 때 열나면 해열제 미리 사놓고 얼마 먹여야 하는지 알아놓자. 백일상은 대여하지 말고 그냥 사자. 아기 침대 들이지 말고 바닥에서 재우자. 하이 체어는 언제 사자.’


등등 아기 월령에 따른 접종 일정과 시기별 필요 물품에 대해 나만의 가이드가 줄줄이 비엔나처럼 따라온다.


이처럼 둘째 육아는 굳이 남들에게 묻지 않아도 되는, 우리 가족에게 선택의 영역이 되어 무지의 불안을 덜어냈다. 아마도 첫째를 키우며 '닥치고 해내던'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단단한 경험으로 남아 빅데이터를 구축해준 덕분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돈을 주고서라도 사고 싶었던 둘째 엄마의 여유는 결국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오랜만에 신생아를 안으니 내 모습이 어딘가 어색했다. 아직 목을 못 가누는데 첫째를 안는 버릇으로 안으니 아이를 넘겨주시던 분들이 몇 번 놀라셨다. 아차차! 싶어 자세를 가다듬고 작디작은 생명을 내 팔과 품에 고정하고 아기가 불편하지 않게 포근히 감싸 봤다. 우리 둘째를 안으니 내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가 내 품에 안긴 느낌은 아직도 표현할 방법을 못 찾았다. 내가 처음 엄마가 되었을 때 느꼈던 '그 신성한 감정은 두 번째 출산이라고 무뎌지지 않는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갓 엄마가 되었을 때를 돌아봤다. 아이와 함께하는 매일은 ‘아기와 함께 태어난 엄마’에게 무한도전일 것이다. 함께 하루를 만드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소동은 있겠지만, 결국 엄마이기에, 부모이기에 해내려고 애를 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4년 전 들었던 ‘닥쳐도 다 한다’는 말(띵언!)은 초보 부모라도 ‘절대 어설프지 않은’ 아기를 지키기 위한 본능이 있다는 방증이리라 본다.



물론, 나의 엄마 경험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간혹 만나는 쌍둥이, 셋째, 심지어 넷째 엄마들을 만나면 나는 또 범접할 수 없는 그들의 아우라를 느껴보며 존경과 경의가 절로 표해진다. 참으로 재미있고도 위대한 영역이다. 그렇게 나는, 우리는 부모가 되어간다.


한편, 전지전능해 보이던 둘째 엄마에게도 말 못 할 고충이 있는데...



♡ 다음 이야기 : 둘째 엄마의 난제

매거진의 이전글 창문으로 인사하는 날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