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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Jun 02. 2023

저 영감님, 왜 그러숑?

98.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7일간 집을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아이의 편지와 메모가 한 장씩 탁자 위에 놓여있다. “할머니 할아버지 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편지) “숨은그림찾기 해 보세요. 1. 핸드폰 거치대 2, 주원이 어렸을 때 사진 3, 모기 물려 가려울 때 바르는 약통(뚜껑 있는 거) 4, 카네이션 달린 주원이 편지 5. 할아버지 냄새나는 실내화.” 

돌아오면 심심할 테니 해보라는 것이다. 심심하기는커녕 힘들어 녹초가 되었는데, 밤늦게 뭘 찾아내라는 것인지. 한숨을 쉬다 보니 아이는 우리가 집에 돌아왔다는 걸 알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정신이 반짝 들었다. 서둘러 찾아서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 

찾으며 힐링하숑.

초등학교 때 소풍 가면 꼭 하는 것이 보물찾기인데 6년 내내 한 번도 ‘보물’ 명칭을 쓴 쪽지를 찾아낸 적이 없다. 친구들은 나뭇가지 사이에서, 돌 틈에서 연필, 공책 따위가 쓰여 있는 보물을 잘도 찾았는데 내 눈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소싯적부터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냉소적이고, 인생관이 조금 비극적이었던 데에는 이런 보물찾기 실패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와 행운은 거리가 멀구나, 신의 은총이란 것도 없거나 허황하고 기만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구나! 파랑새가 날아오고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세상에 그런 새가 어디 있는가. 실제로 사회 생활하면서도 경품을 주는 행사에 무수하게 많이 참석해봤지만, 흔하디흔한 전기포트 하나 걸린 적이 없다. 그러니 보물찾기 숨은그림찾기 따위는 그야말로 아무 쓰잘데 없는 고역일 뿐이다.

그래도 어쩌랴. 졸린 두 눈 비비며 방안 구석구석을 살폈다. 뜻밖에도 나의 그 가물가물한 눈에 숨은그림은 잘도 들어왔다. 아이 사진은 정림사지 5층탑 모형을 담아둔 박스 옆에 붙여두었고, 냄새나는 실내화는 소파의 구석진 곳에 있었고, 핸드폰 거치대는 책상위 보면대 뒤에 있었다. 둥근 뚜껑 있는 모기 물린데 쓰는 약이 문제였지만, 아이 눈높이쯤 되는 책장 서가에서 발견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하나하나 찾다 보니 피로가 가셨다. 눈을 부라리는 동안 ‘힘들어 죽겠다’는 생각이 사라진 탓이었다. 발견한 물건과 장소를 찍어 보내고 나니, 늘어져 자기 좋을 정도로 기분이 풀렸다. 아이가 마술사인지, 아이와의 교감이 마법의 약인지 모르겠지만, 고마웠다.

아이고, 받침이 부러져 책으로 괸 소파 위에 올라가 또 난리다.

우리가 없는 일주일 가운데 사흘을 아이가 산이네 와서 지냈다. 54년 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옛날 주택에 와서 지낸 이유는 단 하나였을 것이다. 이제는 잘 걷지도 못하는, 늙은 산이 탓이다. 미술 학원 선생님이 '누군가에게 색채로 힘을 주는 그림'을 그려보라는 과제를 받고는 한 장은 자신, 다른 한 장은 산이에게 힘을 주는 그린 아이였다. 선생님에게 이렇게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더란다. "외할머니 집에 산이가 있는데, 노견(늙은 개)이어서 잘 걷지도 못하고, 먹는 것도 시원찮고, 여기저기 똥도 싸요. 그래서 산이에게 힘을 주고 싶어요." 

아이는 봄이와 시헌이도 불렀다. 언니 말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아이들인 데다, 애완견을 좋아하고, 귀에 굳은살 박이도록 산이 이야기를 들었으니, 아이들은 엄마를 졸라 세검정 산이네에 왔다. 그리고 셋이서 ‘1박 2일 개량한옥 체험’을 했다. 

보내온 사진 속에서 아이들은 15년 된 아이 엄마의 침대, 이전에 아이가 뛰어놀다가 받침대가 부러진 소파 위에서 방방 뛰고 있었다. 낮에는 비가 적잖이 오는데도 비옷 입고 산이와 함께 산책했고, 해지면 층간 소음 걱정할 것 없이 뛰고 뒹굴고 소리치며 놓았다. 아이고~, 난장판이 되었겠거니 했는데 소파도 침대도 멀쩡했다. 엄마들의 통제가 꽤나 셌나 보다. 

그런 통제에도 잘 따르는 걸 보니 아이가 많이 컸다. 이제는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학원으로 가는 것도 혼자 해결하는 연습도 한다. 연습 첫날 아이에게 미리 이야기해두었다. ‘할머니가 주원이 가까이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학교 끝나면 주원이 혼자서 미술학원에 가봐. 힘들면 소율이랑 같이 가. 소율이 엄마가 온다고 했거든.’ 

산이에게 힘을 주기 위해 그린 부채 그림

그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교문 옆 펜스 뒤에서 아이의 모습을 지켜봤다. 소율이 엄마가 옆에 있는데도 아이는 교문 안에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하교하는 아이들 열이면 아홉 얼굴에 나타나는 해방감과 그로 말미암은 웃음과 재잘거림이 아이 얼굴에는 없었다. 아이는 어색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는지 어둡고 기죽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아이는 학교에서 영어 학원, 영어 학원 통원버스에서 내려 미술학원으로, 피아노 학원에서 눈높이 학원으로 혼자 다니는 거리를 늘려갔다. 

그러던 중 아이가 학교에서 피아노 학원으로, 피아노에서 눈높이 학원으로 뺑뺑이를 혼자 하는 날이었다. 아이는 학교 정문을 나서면서부터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할머니가 어딘가에서 날 지켜볼 텐데~.' 그런 확신이 있었던지 아이는 피아노 학원까지 혼자서 갔다. 학원 앞에서 아이와 우연을 가장해 만났고, 눈높이 학원에도 그렇게 가보자고 다짐했다. 눈높이까지는 제법 거리가 멀었다. 너른 대교아파트를 가로질러 가야했다.

아이가 앞서고 산이 목줄을 잡은 봄이가 뒤서고.

피아노가 끝나고 눈높이로 갈 때는 찾는 걸 포기했는지 뒤돌아보며 찾는 일이 없었다. 다만 단지 안 큰 도로인 찻길이 아니라 2열 주차해놓은 주차장 사잇길로 걸었다. 오가는 차가 불안해서 그런지, 아니면 오가는 사람들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낯선 사람들 사이로 걷는 게 더 불안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아이가 학원이 입주한 상가건물로 들어가기 직전 할아버지는 모른 척하고 아이의 앞을 질러 상가건물로 들어갔다. 머리 허연 할아버지가 누군지 아이가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아이는 할아버지를 부르지 않았다. 첫번째 계단으로 돌아서 몸을 어설프게 숨겼는데 앞서 가던 머리 허연 할아버지의 신원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뒷모습, 걸음걸이만으로는 할아버지를 식별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아는 척했다가, 만에 하나 다른 사람이었을 경우의 낭패감을 걱정해 모른 척한 걸까? 궁금했지만 아이의 뺑뺑이가 끝날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나보다 더 궁금했던 할머니가 물었다. “주원아, 눈높이 학원 건물로 들어갈 때 할아버지가 앞질러 가는 거 몰랐어?” “아니, 알았어.” “그런데 왜 모른 척했어? 할아버지가 따라오는 게 싫었어?” 아이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장난끼 철철 넘치는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아냐, 저 영감 왜 저러숑?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

아이고, 요놈. 할아버지한테 ‘저 영감’이라니. ‘탱이’를 붙이지 않은 것만으로 위안 삼을 도리밖에. 그런데 ‘~숑’은 뭐람? 

“그런데 했숑이 뭐니?” “응, <날아라 슈퍼보드> 있잖아. 거기서 저팔계가 하는 말투야. 할머니 왔숑? 왜 살이 쪘숑? 나는 날씬한 저팔계, 엄마는 뚱뚱한 저팔계!” 아이 엄마가 기겁을 하지만 말릴 수 없다. “엄마는 나보다 살이 쪘잖아! 왜 그러숑?”

“그러면 할아버지는 사오정이네. 무슨 말을 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잖아.” “맞아, 두 번, 세 번 말해야 알아들어. 사오정도 그래. 할아버지는 사오정, 나는 날씬한 저팔계.” 맞는 말이다. 할아버지는 귀가 갈수록 어두워진다. 눈은 그런대로 쓸 만한데, 귀는 영 믿을 수가 없다. 그래도 그런 할아버지를 착하고 귀여운 캐릭터로 변신시켜주니 그저 고맙다.

어른들은 모를꺼야, 이동하는 사이에 먹는 간식의 이 맛!

저팔계 사오정 때문에 잠깐 비껴갔지만, 아이는 할아버지의 장난을 관조할 정도로 생각이 멀쩡해졌다. 괜히 아이에게 장난을 잘못 걸었다가는 영감탱이, 본전은커녕 쪽박마저 깰 수 있다.

그래도 아이는 아이다. 일주일 동안 못 보다가 이튿날 아이를 맞으러 학교엘 갔다. 아이는 벌써, 학생과 부모가 엉켜 있는 교문 안 한 가운데에 있었다. 할머니가 학교에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실에서 일찍 나와 찾고 있는데 먼저 와 있어야 할 할머니가 눈에 띄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던 중 교문 밖에서 지켜보던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꿩 대신 닭이었을까? 아이는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와 안긴다. 안겨서 한다는 말이 냉정하다. “할머니는?” “으응, 저기 오시잖아.” 

아이는 단 1초도 주저하지 않고 할아버지를 뿌리친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맹렬하게 달려간다. “할머니~. 할머니 안녕하셨숑?”

할머니 잘 있었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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