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오늘 산이 할머니 집에서 잘 거야."
새해 첫날 다섯 살 된 손녀가 마곡동 왕할머니(외증조외할머니) 집을 나설 때였다. 손녀는 안고 있는 할아버지의 귀에 속삭였다.
진짜? 응!
말만으로도 고마웠다. 새해 아이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주는 망외의 선물이었다. 아내에게 전했다. 아내는 반색하며 역시 속삭이듯 아이에게 되물었다. 아이의 답은 같았다. 확신과 의지로 충만했다.
응!
그날 아이는 엄마 아빠의 손에 이끌려 ‘홍은동 왕할머니(외증조친할머니)’가 머무는 요양병원엘 갔다가 마곡동 집으로 왔다. 댓 시간 실컷 먹고 놀다가 8시가 넘어서야 집을 나서는 참이었다. 애 엄마는 놀랐다. 두 곳을 순방했으면 이제 피곤할 법도 한데 이번엔 세검정 집으로 가겠다니, 믿기지 않는 듯했다. “진짜?” “응, 나 산이할머니네 갈래.” 아이는 엄마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엄마 아빠는 집에서 잘텐데?” ‘….’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아내가 조용조용 물었다. “엄마 아빠랑 떨어져서 자도 돼?” “응.” “엄마 아빠 없다고 슬퍼서 울면 어떻하지?” “할머니가 있잖아.” 아이의 생각은 너무나 분명했다. 우리는 어릴 적 정초엔 어른 댁을 두루 다니며 새해 인사를 했지만, 아이에겐 그런 관습도 개념도 없었다.
우리 차와 딸네 차 사이에서 주춤하다가, 할아버지는 아이를 덥석 안아 들고 아빠 차 뒷자석 유아용 카시트에 앉혔다. 아이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앞만 보고 있었다. 동그랗게 뜬 눈이 슬픔보다는 분노로 가득한 듯했다.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무기력을 확인하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빠진 모습이었다. 할머니가 차창을 두들기며 손을 흔들었지만 아이는 눈도 맞추지 않았다.
귀가하고서도 아이의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영 떠나질 않는다. 나는 아내에게 같은 내용을 돌려가며 두어 차례 물었다. “엄마 아빠라면 사족을 못 쓰던 손녀가 왜 그랬을까.” “엄마나 아빠가 회사에서 돌아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할머니 품에서 떠나던 아이가 왜 그랬을까?”
다음날 아내가 손녀를 어린이집에서 하원시키러 갔을 때 선생님에게 들었다는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갈 무렵 손녀가 머리를 파묻고 흐느끼더란다. ‘주원아 어디 아파?’ ‘아니.’ ‘걱정되는 게 있어?’ ‘산이 할머니가 보고 싶어. 안 오시면 어떡해?’ ‘선생님이 전화해서 오시라고 할게.’ 다행히 그날 하원 당번은 아내였다. 산이할머니가 나타나자 아이는 멀찌감치서 두 팔 벌리고 아이의 최고 속도로 달려오더란다.
그렇다고 할머니에게서 떠나고 싶지 않아 우리 집으로 가자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아이를 세검정 할머니 집으로 유혹했을까? 아이는 아무 말 없다.
연세를 그렇게 드시고도 그것을 모르느냐고 핀잔하는 얼굴이다.
집은 삶의 보석상자라고 했다. 아마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빛나고 또 소중해지는 자취와 기억들이 구석구석에 별처럼 담겨있는 공간이라는 뜻일 게다. 요즘 어른들에게는 부와 신분의 상징으로 통하지만, 손녀가 넌지시 알려주듯이 아이들에게 집은 크건 작건, 호화롭건 남루하건, 달동네건 강남 마용성이건 관계없이 여전히 아름답고 소중한 보석상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손주가 엄마 아빠와 떨어져 오래고 낡은 산이할머니네 집을 단호하게 선택했겠지.
이제부터 많은 어른들이 잃어버린 그 보석 상자와 거기에 담긴 보석들을, 아이를 뒤쫓아가며 그의 눈과 귀와 기억과 직관에 의존해 찾아봐야겠다. 50년 넘게 세검정에서 산 할아버지와 30년 가까이 살고 있는 할머니의 기억도 되살려야겠다. 집이 보석 상자라면, 마을은 작은 상자들을 담고 있는 큰 보석함. 그 속에 잠들어 있던 이야기들을 되살려, 기억의 궁전을 만들어봐야겠다.
저기 백사실은 엄마가 열 살 때 친구들이랑 책걸이 핑계로 놀던 데고, 자하슈퍼는 할아버지가 치통 때문에 잠을 못 이루던 셋방이었고, 그 옆을 흐르는 개울엔 아주 오래전 종이 만들던 공장이 있었고, 평창동 42번지엔 물난리로 여러 아이와 엄마 아빠가 사라진 곳이고~, 아마 저 늙은 느티나무들은 그걸 다 기억하고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