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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Oct 28. 2021

유년의 숲속, 신비한 중강새

58.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어린이집 선생님이 손바닥 반만 한 비닐 지퍼백을 하나 주면서 이렇게 전하더란다. 메주콩 반쪽만 한 이빨 하나가 들어 있는 지퍼백이었다. 

'내가 해내다니~.' 아이는 자랑스럽다.

그날도 아이는 친구들과 정신없이 뛰어놀았다고 한다. 뛰어가고 붙잡고, 숨고 찾고, 잡고 뒹굴고, 송사리 떼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던 중 주원이가 갑자기 선생님에게 달려오더란다. “선생님, 앞니 있는 데가 이상해요.” 

“와, 주원이 앞니 하나 빠졌어요.” 선생님이 외치자 방 안의 친구들이 일제히 몰려왔다. “어디 있어요.” “저도 보여주세요.” “주원아, 안 아파.” 아이들은 팔짝팔짝 발을 구르는가 하면 박수까지 치며, 제 일처럼 좋아하더란다. 모두가 안고 있는 숙제를 주원이가 푼 것 같았다.      

아이 아래 앞니가 흔들리기 시작한 지는 제법 오래됐다. 한 놈은 석 달쯤 됐고, 다른 한 놈은 한 달쯤 됐다. 아이는 밥을 먹건 과자를 먹건 심지어 물을 마실 때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김치나 깍두기는 잘게 썰어 주어야 먹었고 물도 미지근해야 마셨다. 

“이는 왜 빠져? 가만 놔둬도 빠져? 빠질 때 아파?” 

아이는 엄마나 할머니에게 하루에도 서너 번씩 물었다. 

“‘유치’는 아주 작잖아. 어른 거랑 비교해봐. 크기가 반도 안 되지?” 

“유치? 그러면 어른 이는 성치야?” 아이는 눈을 반짝였다. 

“으잉? 성치가 아니고 영구치라고 해. 유치가 빠지면 나는 이야. 한 번 나면 평생 써야 한다고 해서 영구치라고 해.” 

우리 클 때는 젖니, 간니라고 배웠는데 요즘 엄마 아빠들은 ‘유치’ ‘영구치’라고 한다. 젖 먹을 나이에 나온다고 해서 젖니, 기둥처럼 튼튼하다고 해서 간니, 젖내도 나고 땀내도 나는 젖니 간니는 사라지고 있었다.

“이는 한 번 나면 커지지 않아. 키도 크고 머리카락도 자라고, 손톱 발톱도 길어지고, 입도 손도 발도 커지는데 이는 처음 난 것 그대로야. 그런데 어른이 되어도 이가 콩알만 해서야 어떻게 질긴 고기며 딱딱한 갈비, 깍두기를 어떻게 먹겠어.”

아이 엄마가 요령없이 강의를 하려든다. 가르치려든다. 아이의 관심사를 모르는 탓이다. 아이가 듣고 싶은 것은 이가 빠질 때 아픈지, 아닌지였다. 안 아프고 빠지는지 아니면 치과에서처럼 잡아 빼야 하는 건지만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이 엄마는 강의를 마무리하려 한다. “큰 이가 새로 나야겠지?”

“흔들리는 이를 어떻게 빼냐고!” 

“응, 엄마 클 때는 말이야….” 

처음 빠진 아래 앞니

아이는 ‘안 아프게 쏙 빠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엄마의 대답은 아이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다. 

‘튼튼한 명주실 한쪽에 흔들리는 이빨 밑동을 이렇게 묶고, 다른 쪽 실 끝은 아빠가 잡고 있다가 아이가 딴청을 부릴 때 이마를 툭 치는 거야. 그러면 아이 머리가 뒤로 젖혀지면서 이가 쑥 빠지지. 그렇지 않으면, 실 한쪽 끝을 문고리에 묶는 거야. 그리고는 엄마나 아빠가 갑자기 방문을 툭 미는 거지.’ 아이 눈이 겁에 질려 동그랗다. ‘이건 더 무시무시한 방법인데, 요새 치과 선생님들이 하는 거랑 비슷해. 펜치 있잖아. 그걸로 이를 꽉 잡은 뒤 쑥 빼는 거야. 이렇게 하면 뿌리가 부러지는 일이 없이 쑥 뺄 수 있지.’ 

아이는 사색이 됐다. 입을 어찌나 꽉 다물었는지 입술이 한일자로 펴지고, 어금니 쪽 근육이 씰룩거린다. 실 한 가락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각오 같았다. 눈에 눈물이 고일 듯하다. 그제야 달랜다. 

“그런데 말이야, 주원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유치가 흔들리는 건 밑에서 영구치가 유치를 밀어내기 때문이야. 가만히 놔둬도 빠진다고 해. 혀끝으로 흔들리는 이의 뿌리를 자꾸 밀어내면 더 쉽게 나온대. 주원이가 잘 하잖아.” 입을 벌리고 혀끝으로 앞니 뿌리를 미는 시늉을 한다. 

서운했는데~, 모두 사랑해요.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혀끝으로 앞니를 미는 게 습관이 됐다. 그럴 때면 오물거리는 입술이 붕어 같았다. 그림책을 읽거나 퍼즐을 맞추거나 그림 장난을 그리고, 심지어 엄마나 친구들과 이야기 할 때도 입술을 달싹거리고 삐죽였다. 

놀 때만은 예외였다. 일단 동무들이랑 어울리기 시작하면 다른 건 모두 잊고, 오로지 놀이에 빠진다. 그날 첫 젖니 갈이 때도 그랬다.      

“마스크를 내리고 봤더니 아래 앞니 하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빠진 이도 어디로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어요. 자세히 보려고 마스크를 아예 벗기자 뭔가 툭 떨어지는 거예요. 빠진 이가 마스크에 걸려 있었던 거죠.” 

주원이 곁으로 몰려든 아이들도 이가 하나둘 흔들렸다. 모두가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셈이었다. 

“아팠어?”라는 질문이 쏟아졌고, “어떻게 빠졌어?”라고 묻기도 했지만 아이는 대답할 수 없었다. 놀다가 언젠지도 모르게 빠졌으니 아이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그런 친구를 보는 아이들도 신이 났다. ‘그래, 아프지 않구나.’ 저마다 걱정과 두려움을 안고 있던 아이들도 안심했다. 한 친구는 심지어 이렇게 장난치기도 했다. “주원아, 그거 깨물어봐도 돼?” 

할아버지 할머니 나이쯤 되면 젖니 빠질 때의 감정이 대부분 사라졌다. 무너지기 쉬운 기억도 문제지만, 그때만 해도 아이들의 젖니 갈이에 신경을 쓸 만큼 여유가 있는 부모는 별로 없었다. 

젖니 갈이는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몸의 변화다. 있는 것이 사라지고 새것이 생기는 첫 변화다. 뭔가 잘못 씹으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프기까지 하다. 더 큰 문제는 설사 부모라도 그 고통과 두려움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저 혼자 감당해야 한다. ‘이 나이에, 혼자서!’ 어떤 아이건, 치과 의사 아이라도 심각하다. 그야말로 생애 처음으로 겪는 실존적인 불안이다. 

먼저 경험한 형제에게서나 조언 구하는 게 고작이지만, 형이나 누이는 신이 나서 중강새니 금강새니 하며 놀릴 뿐이다. 

“앞니 빠진 중강새, 우물가에 가지 마라, 붕어 새끼 놀랜다, 잉어 새끼 놀랜다.” 대표적인 놀림 노래다. ‘중강새’는 쇠스랑이나 갈고랑시 등 농기구를 뜻한다는데 이가 빠져 중간이 샌다는 것이니 써먹기 힘든 농기구다. 노래는 이렇게 이어진다. “앞니 빠진 중강새 닭장 곁에 가지 마라, 암탉한테 채일라 수탉한테 채일라 앞니 빠진 중강새 우물 곁에 가지마라, 붕어 새끼 놀랜다 잉어 새끼 놀랜다.”

윗니까지 빠진 경우엔, 보기도 흉한데 놀림은 더 야비해진다. “윗니 빠진 달강새(이가 흔들려 달강거리는 모습), 골방 속에 가지 마라, 빈대한테 뺨 맞을라, 벼룩이한테 차일라. 앞니 빠진 중강새, 닭장 곁에 가지 마라, 암탉한테 차일라, 수탉한테 차일라.” 야속하다. 그렇다고 울지도 못한다. 언니들이 겁쟁이라고 놀리는 건 더 싫다. 

이렇게 놀고

아이도 이 노래를 알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배운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어디서? “응, 책 보고 알았어.” 어린이집 서가에 있었나 보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앞니 빠진 중강새’라는 제목의 그림책만도 서너 종이 있었다. 

아이는 앞니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아무도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주지 못하자, 제가 어린이집 서가를 뒤졌거나, 먼저 이 빠진 친구가 보던 것을 함께 읽었을지 모른다. 아이는 그 책을 어떻게 읽게 됐는지 말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이런 경험은 세상의 모든 아이가 겪었고 또 겪는가 보다. 우리나라만 해도 ‘중강새 노래’는 지역마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돼 불린다. 수십 종이 넘는 걸 보면, 그 나이엔 이만큼 재밌게 놀려먹는 게 없었나 보다. 대개는 ‘중강새’를 개호주, 갈가지, 개오지, 개우지, 갈강새, 금강새 등으로 바꿔 부른다. 개호주는 호랑이 새끼의 방언이고 금강새는 중강쇠와 같은 뜻으로 보인다.

경상도 버전은 사투리가 재밌다. “앞니 빠졌는 갈가지, 언덕 밑에 가지 마라, 소의 새끼 놀랜다, 산지슭에 가지 말라, 놀개 새끼 놀랜다, 마구에 가지 마라, 산지 새끼 놀랜다, 밴소에 가지 마라, 굼비 새끼 놀랜다.” 노랫말 중 갈가지는 ‘이빨 빠진 아이를 놀리는 말’이고 산지슭은 산기슭, 마구는 마구간, 놀개는 노루, 산지는 송아지, 밴소는 변소, 굼비는 굼뱅이의 경북 의성 지역 방언이다. 

경북 경주에선 이렇게 바뀐다. “앞니 빠진 갈가지, 밑니 빠진 노장, 그랑까에(개울가에) 가지 마라, 피리(피래미) 새끼 놀랜다.” 강원도 삼척 바닷가 마을에선 장난이 더 심해졌다. “앞니 빠진 수망다리(이빨 빠진 아이를 놀리는 말), 개똥에 미끄러져, 쇠똥에 코 박는다.”

저렇게 놀다가 빠졌다.

젖니가 빠지는 건 신체적으로 유년기에서 벗어나는 징표다. 조선시대 같으면 예의범절도 배우고 천자문 명심보감 따위를 배울 때다. 정신적으로도 아이는 자기중심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또래 친구에 눈을 돌리고, 친구와 어울리는 걸 더 좋아한다. 집안에서 미꾸라지처럼 말을 안 듣는 ‘미운 일곱 살’ 시기다. 

젖니 갈이 때 언니 오빠가 놀려대는 것은 일종의 통과의례다. 통과의례란 이전의 삶을 털어버리고(분리)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통합) 과정에서 치르는 의식이다. 언니 오빠들은 동생이 ‘이전의 삶’을 털어내도록 놀림을 동원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치르는 통과의례의 ‘폭력적 형태’에 비하면 그야말로 장난이다.

통과의례에선 놀림이 있으면 다독임이 있고, 누름이 있으면 풀림이 있다. 아이는 언니 오빠들로부터 위로와 풀림 그리고 통합과 환영의 의례도 치른다. 그것이 빠진 이를 지붕에 던지며 함께 부르는 이런 노래다. “까치야, 까치야,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 ‘함께 놀 친구’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헌 이를 던져 올릴 지붕도 없고, 새 이를 가져다줄 까치도 흔치 않고, 특히 의례를 치러줄 언니 오빠가 대부분 없으니 안타깝다. 

이제 해장국 뼈다구도 씹어야지! 

나흘 뒤 가족 톡방에 아이의 입을 클로즈업한 얼굴 사진이 올라왔다. 이가 하나 더 빠졌다. 빠진 이 옆의 것이었다. 아래 앞니 두 개가 모두 빠졌으니 그야말로 바람 새는 중강새였다. 그러나 아이는 스스로 대견스러운지 싱글벙글 만면에 웃음이다. 

이번에도 놀다가 빠졌다고 한다. 이웃 동생들과 정신없이 할로윈 놀이를 하던 중이었다. 아빠한테 달려가 가슴을 깨물었는데 입안에 굴러다니는 것이 있어 보니까 빠진 이였다고 한다. 

아이가 통과의례를 개운하게 통과한 것을 기념하지 않을 수 없다. 함께 외식을 했다. 메뉴는 뼈다귀 해장국! 이제 영구치도 나온다니 힘껏 뜯어야지. 혹시 돼지 등뼈의 감자를 파먹다가 흔들리는 이빨이 또 쑥 빠진다면 이 얼마나 횡재인가. 

“주원아, 동생들이 뭐라고 불러?” “앞니가 두 개나 없으니 할머니 같잖아.” “주원이 할머니래요, 주원이 할머니래요.” 아이는 유년의 신비한 숲을 그렇게 우악스럽게 통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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