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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Jan 13. 2023

아이야, 너만 믿는다

85.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1월 4일 아이가 올해부터 다니게 될 초등학교에 다녀왔다. 입학을 앞둔 예비소집이었다. 정식 등교는 아니지만, 새로운 신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아이는 이제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복잡계 속으로 들어간다.

가족은 그것이 더 넓고 풍부한 세계를 경험하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아이가 붕어빵 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도 적잖다.

지난해 말부터 아이는 초등학교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상기되고 미열까지 동반하는 진학 증후군 증상을 보였다. 이제 원생이 아니라 학생이 된다는 자부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원생 때는 엄마 아빠나 선생님에 이끌려 그저 잘 놀면 되지만 학생이 되면 혼자 할 일도 많아진다. 등하교는 물론 공부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 아이는 자신의 성장을 실감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학교생활에 대한 기대와 불안감도 섞여 그런 증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나 초등학교 가요.

아마 그와 비슷한 시점이었을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해주는 대로 머리 손질을 하지 않는다. 그동안 집에서나 어린이집에서는 머리카락을 한 갈래 혹은 두 갈래로 따서 뒤로 혹은 위로 묶고, 예쁜 핀으로 고정시켰다. 그러나 이제는 있는 그대로 생머리를 좋아한다. 단정하고 예쁘게 땋고 묶는 것은 원생 머리이고,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는 것이 학생 머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보다. 초중고로 진학할수록 가장 변화무쌍한 것이 옷과 머리의 스타일인데, 아이는 이제 변화의 격류에 휩쓸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비소집 당일 아이는 깨우지도 않았는데 일찍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하더란다. 세수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머리 빗는 것만은 혼자 할 수 없었는지 엄마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생머리를 요구했다. 앞으로는 할아버지 카톡 문패 사진과 같은 이마와 귀가 환하게 보이는, 땋아 묶는 머리는 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예비소집은 부모의 입학동의서 등 몇 가지 제출할 서류를 받아오고, 학교를 둘러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아이는 책가방 메고 크로스백 두르고 신발 주머니 드는 등 등교 채비를 완전히 갖추고 거울 앞에 섰다. 뜨거운 찐빵처럼 부풀 대로 부푼 아이의 기대를 깨지 않으면서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이 아빠는 적잖이 고민했다. 아이는 설명을 두어 차례 듣고서야 비로소 크로스백만 어깨에 가로질러 걸고 학교에 갔다고 한다.

‘나 때는’ 생각에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지나간다. 60년 전 해미 촌구석에서 책가방을 멘 아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교실엔 맨발로 드나들었으니, 신발 주머니가 필요가 없었다. 학용품이라고는 교과서와 공책, 필통이 전부였으니 크로스백을 할 이유가 없었다. 보자기(책보) 하나면 됐다. 면장 딸 혹은 농협 조합장 아들이나 간혹 책가방 메고 다녔을 뿐이다.

그 아이들을 부러워 하기도 했지만, 학교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그게 어딘가. 책보를 크로스백처럼 등에 둘러메고 학교 가는 길은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다. 몸집은 주먹만 해도 두 발로 선 다람쥐처럼 어깨가 저절로 으쓱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많이 컸다’는 말에 진짜 큰 줄 알았고, 여전히 코찔찔이 꼬마로 비웃는 형들의 놀림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날 아이가 그렇게 메고 싶었던 책가방은 아이 할머니의 그런 ‘나 때는’ 추억이 담긴 선물이었다.

선물은 할머니가 줬는데

요즘 초등학교 입학하는 아이에겐 이런 속설이 있나 보다. 아이가 처음 메는 가방을 좋은 학교 출신에게서 물려받으면 아이도 좋은 학교에 간다! 자식을 좋은 대학 보내고 싶은 부모들의 열망이 별 희한한 속설이나 미신을 지어낸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이를 중심으로 돌지만, 우리나라 아이들은 대학을 중심으로 뺑뺑이 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엔 그렇게 훌륭한 언니나 오빠가 없다. 아이 엄마는 고민 끝에 그중 등록금이 싼 대학교를 나온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책임을 넘겼다. 속설이나 미신은 그렇다 해도 아이가 대학 중심의 뺑뺑이 대열에 들어가는 게 께름칙하긴 하지만, 아이에게 이미 통보했다고 하니 피할 도리가 없다.

앞서 딸은 아이와 함께 취학용 어린이 전문매장을 두세 곳 다니며 아이가 좋아하는 가방을 골랐고 상품명을 할머니에게 전달했으며 할머니는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그리고 양력 설날 세검정에 온 아이에게 증정했다.

포장한 상자째 받은 선물이지만 아이는 내용물을 알고 있던 터라 새로울 게 없었다. 그런데도 포장지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뜯던지 할머니의 도움을 받고서야 겨우 포장지를 벗기고 상자를 열 수 있었다. 가방과 크로스백, 신발 주머니를 차례로 꺼내던 아이의 달덩이처럼 환하게 빛나던 얼굴이란~, 그런데 갑자기 아이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학년이 올라가면 갈수록 더욱더 지겨워질 책가방일 텐데~, 할아버지가 한마디 하려다 입을 다문다.

선물 증정식이 끝나고 아이 엄마는 아이의 새해부터 달라질 일과를 설명했다. “엄마, 주원이가 새해부터 보습학원에 다니게 될 거야. 내가 가자고 한 것도 아닌데, 제가 가겠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엄마는 요일마다 유치원에 몇 시에 가서 학원엔 몇 시까지 데려가 주세요~.”

보습학원은 월수목 사흘 가는데 하루에 한 시간 반 정도씩 국어 수학 영어 한문을 배우고 또 자습한다고 한다. 정해진 진도에 따라 아이가 스스로 학습을 하고, 선생님은 아이들을 한 명씩 돌아가며 아이의 수준에 맞춰 개인 지도를 한다고 한다.

잔소리는 할아버지가 다 한다

‘아이고’,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미술과 음악도 하는데, 월수목 사흘을 더 학원에 다닌다고? 미술, 피아노 학원과 겹치는 날엔 오전 9시에 등원해 오후 네 시 반쯤 하원하고 미술이나 음악 학원에 갔다가 다섯 반에 보습학원으로 간다고? 그런 날엔 저녁 7시까지 공부를 한다고?

할아버지는 아들딸이 어렸을 때 ‘버럭’으로 통했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사라졌던 그 못 된 성깔이 불쑥 튀어나왔다. 애를 잡으려고 하냐? 붕어빵 틀에 넣는다고 붕어가 되냐 잉어가 되냐, 고작해야 풀빵 아니냐. 왜 여의도 같은 곳으로 이사 가서 애를 생고생시켜 붕어빵 만들려고 하냐. 보습학원도 다른 애들이 간다고 하니 애도 따라서 가겠다고 하는 거 아니냐. 여기 세검정에 학원이 있냐 뭐가 있냐. 여기서 자란 너희들에게 뭐 잘못된 거라도 있냐.

아이가 원했다고 하지만, 사실 피아노도 발레도 미술도 영어도 아이가 원한다고 보냈다. 알고 보면 아이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의 다른 아이들이 다니니까 따라서 간다고 한 것이었다. 일찌감치 싫증 내고 발레나 영어를 그만둔 것도 따라서 하다 보니 그런 것이었다.

입은 닫고 지갑만 열라고 했는데, 새해 벽두부터 할아버지는 숨이 차도록 장광설을 쏟아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이 한 마디를 생각하지 못하는 할아버지다.

시끄럽게 군 것이 미안했던지 할아버지는 아이의 늘어진 가방 줄을 아이의 어깨높이에 맞게 조여준다. 가슴끈 매는 법을 알려준다. 조용히 도와주기만 하면 좋으련만, 가방 고르러 갔을 때 엄마가 한 얘기를 듣고는 아이가 ‘나 커서 ㅇㅇ대학교 갈거야’라고 했다는 말이 떠올라, 이번엔 아이에게 다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한 나라의 으뜸 되는 도시를 수도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수도는? 서울!(유치원에서 배웠다.) 서울의 옛날 이름은 뭐? 한양. 맞아 한양이나 서울이나 같은 곳이야. 옛날엔 한양이 가장 크고 좋았지. 그러니 서울***나 한양***나 다 같아.

이런 대학도 있어. 우리나라가 영토가 가장 넓었을 때 나라 이름은 뭐지? ‘역사는 흐른다’ 노래에서 광개토대왕 나오지? 그 왕이 다스리던 나라는? 고구려! 고구려를 잇겠다며 왕건이 세운 나라는? 고려! 그 이름으로 세운 학교가 고려***이야.

그런데 이런 학교는 사실 국내용이야. 요즘은 제 나라 안에서만 살 수 없잖아. 세계 여러 나라와 교류도 하고 무역도 하고 도와주고 도움을 받아야지. 그러자면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해 깊게 공부해야 하는데, 그런 학교도 있어. 무슨 학교지? 몰라. 한국외국어대학! 엄마가 다닌 학교야. 주원이가 매일 하고 싶은 거 있잖아, 게임도 있고. 유투브나 게임 전화통화 등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거. 스마트폰! 그래, 스마트폰은 과학자나 기술자 없이는 만들 수 없었어. 그런 분들을 양성하는 학교가 있지. 주원이가 지금은 모르겠지만 조금 더 크면 알 수 있을 거야, 한국과학기술원 혹은 카이스트라고 부르지. 훌륭한 학교인데, 등록금도 안 받아.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만 하라는 거야. 얼마나 좋아. 주원이가 갈 학교는 참 많아. 미리 정해둘 필요는 없어. **대ㅔ학교 나온 사람 중에는 탐욕스런 사람이 많아 국민들을 힘들게 하곤 하지.

올해도 잘 놀자. 그게 남는 거야.

처음엔 솔깃해서 듣던 아이가 몸을 비비 튼다. 선물은 할머니가 줬는데 할아버지 잔소리가 너무 심한 거 아냐? 그런 표정이다. 그렇다고 놔줄 할아버지가 아니다. 가방을 여기저기 만져주는 척하며 결론까지 맺으려 한다.

주원아,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주원이가 무슨 공부를 하고 싶은지, 그 공부를 해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이런 목표와 계획이 중요하지. 대학은 이런 걸 세운 뒤 거기에 맞는 곳을 선택하면 돼. 더 중요한 것은 주원이가 하고 싶은 거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거지. 생각과 계획만 있으면 뭐해, 주원이가 좋아하는 라면이 있는데 보고만 있으면 먹을 수 없잖아. 물 넣고 끓인 뒤 달걀도 넣고 김도 넣고 해야 맛있게 먹을 수 있지. 학교란 학생이 무엇을 왜 하고 싶은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찾고 노력하도록 도와주는 곳이야.

아이가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그 뒤에 대고 할아버지가 한마디 덧붙였다. “학교에 들어가는 건, 고달픈 인생의 시작이야, 시작.”

그날 아이 아빠와 엄마가, 노총각 삼촌에게 생일선물을 줬다. 싱글거리며 주는 모습이 수상쩍다 싶었는데 포장을 뜯어 보니, 잠옷이다. 그것도 한 벌이 아니라 여자 잠옷까지 두 벌이다. 아이 빼고 시원하게 박장대소했다. 속내를 모르는 아이만 ‘삼촌, 이것도 삼촌이 입어? 잠옷 예쁘다’라고 부러워했다.


지난 연말 삼촌의 생일 아침, 카톡으로 축하 인사를 나눌 때 할아버지는 이렇게 썼다. “반육십 넘어 반칠십으로 가는구나. 십 년 이십 년 뒤를 생각하며 계획을 세워야 할 나이다. 축하하기에 앞서 나이의 무거움이 느껴진다.”

딸이 이렇게 대꾸했다. “결혼하라는 말을 이리 에둘러 하시네 ㅋㅋ.”

뒤이어 이런 문자가 오갔다.

“그런 의미였나?”(삼촌) “해석은 자유. 그러나 해석엔 본인의 희망 사항이 섞이기 마련. 동생 생각하는 누나 마음이 각별한 거 같다.” “ㅋㅋㅋㅋㅋㅋ”

요즘 결혼하라는 말을 하기가 이렇게 어렵다. 사실 결혼보다 더 바라는 건 손주인데~, 언감생심 그런 말을 어떻게 꺼내겠는가. 그 말 나오면 결혼하겠다고 하다가도 포기할지 모르는데. 주원아, 네가 졸라야겠다. 너만 믿는다.    

 

아빠(매형)가 삼촌(처남)에게 준 선물은 남녀 잠옷 두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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