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곽병찬 Jan 21. 2023

난 유치원 애들이랑 살거야

86.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아이 아빠 생일 저녁이었다. 

내 딴에는 아이에게 어려운 질문이겠거니 생각하며 물었다. 

“오늘로 아빠 몇 살?” 

“38살.”

아빠, 무지무지 사랑해

정답이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아침 생일상을 받으며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제 나이도 아니고 아빠 나이를 저렇게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지금도 어머니들의 나이가 자주 헷갈린다. 태어난 해를 떠올려 계산을 해야 답이 나온다. 내 나이조차 헷갈릴 때가 많다. 올해로 예순여섯인가 예순일곱인가. 아니면 예순다섯인가.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행정 관청 공무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부가 나서서 이른바 ‘세는 나이’와 ‘만 나이’를 통일하겠다고 나설 리 없다. 

이번엔 내 경험에 비추어 진짜 혼란스러운 문제라고 생각하며 물어봤다. 

“그러면 주원이는 몇 살?”

아이가 할아버지의 눈을 빤히 쳐다본다. 나를 아기 취급하느냐고 따지는 것 같다.

“여덟 살!”

아차 싶었다. 대한민국 어린이치고 여덟 살을 모르는 아이는 없다. 이른바 취학 연령, 즉 초등학교 입학하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린이집 혹은 유치원에 다니면서 오매불망 여덟 살이 되기만을 기다린다. 더 크고 더 넓고 더 의젓한 세계, 아이를 벗어나 소년 소녀의 세계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코찔찔이가 아니다!’ 그 기준이 바로 여덟 살이다.

유치원이란 게 희귀했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어릴 때는 더 심했다. 같이 놀던, 아니 데리고 놀아주던 언니 형들이 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눈앞이 아득했다.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언니들 따라 학교에 가겠다고 조르는 아이는 물론 심지어 실제로 따라서 가는 아이도 있었다. 학교도 학교 나름대로 집에 돌보거나 놀아줄 사람이 없어 언니가 데리고 오는 아이들을 교실 뒤편이나 운동장에서 놀도록 허락했다. 

찬란한 여덟 살의 기억

그 시절 일하는 부모들에게 학교는 만병통치약이었다. 학교엔 아이의 놀 친구도, 도와줄 형이나 언니도, 글이나 운동을 가르쳐줄 선생님도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여덟 살에 대한 기다림은 생애 최초의 가장 설레고 벅차고 희망찬 것이었다.

요즘은 그런 여덟 살에 대한 기다림과 설렘이 덜해진 것 아닌지 모르겠다. 아이가 사는 여의도 학부모들 가운데 상당수가 학교에 부탁한다는 것이, “너무 잘 가르치려 하지 마세요. 그저 다치지 않고 잘 놀다가 돌아오게 해주세요”라는 것이란다. 가르치는 일은 학원에 다 맡겼으니 학교는 보호만 해달라는 부탁이다. 이들에게 의무교육은 거추장스러운 혹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도 그런 되바라진 영향을 받아 ‘여덟 살’에 대한 설렘이 많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학원이나 학교나 그게 그거 아냐?’

아이가 할아버지의 수준을 의심하며 똑 부러지게 ‘여덟 살’을 외치는 것이 여간 대견스럽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었다. 아이는 그때 그 설렘을 공유하고 있었다. 책가방을 메고, 크로스백을 목에 걸치고 신발주머니를 들었을 때 아이의 온몸에서 발산하는 설렘과 희망과 자부심의 아우라는 얼마나 눈부셨던가. 만년설에 덮힌 히말라야의 빛나는 산 정상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잘난 척은 못 참는 할아버지다. 

“그럼 주원이는 만 나이가 뭔지 알아?” “세는 나이란 것도 있어. 잘 모르지?” 

아이가 알 리 없다. 아니 알 필요도 없다. ‘내 나이 여덟이면 됐지, 또 다른 나이가 왜 있어야 해. 또 그걸 알아야 할 필요가 어디 있어?’ 아이는 오히려 그렇게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할아버지가 오늘 왜 저러지? 한 살 더 늙었다고 더 상했나?’

그래도 할아버지는 꼰대를 포기할 수 없다. '그래 너희는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너에게도 이런 날이 올 거다! 쳇바퀴 같은 학교생활과 학원 공부에 치이다 보면 언젠가 여덟 살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솜사탕처럼 녹아 사라지고, 시키는 대로 아니면 정해진대로 하다 보면 하루하루가 지겨워지는 날이 말이다. 그러면 너는  나이 먹는 것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나이도 잊게 될 것이다. 그때쯤 너는 나이 셈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주원아, 커서도 아빠랑 살자.

“주원이의 세는 나이는 여덟 살이야. 그런데 주원이의 만 나이는 여섯 살이지. 두 살이나 차이가 나지. 주원이가 태어난 날은 하나인데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주원이 나이는 이렇게 뒤죽박죽이란 말이야. 왜 그럴까?”

“뒤죽박죽? 뒤죽박죽!” 아이는 죽도 되고 박도 되는 말이 재밌는가 보다. “할아버지는 뒤죽, 할머니는 박죽. 뒤죽박죽.”

사실 우리나라 나이만큼 헤아리기 어려운 게 없다. 보통 2개다. 생일이 오면 한 살 더 먹는 ‘만 나이’와 태어나면 무조건 한 살 먹고 해가 바뀌면 무조건 한 살 더 먹는 ‘세는 나이’가 그것이다. 여기에 ‘세는 나이’와 ‘만 나이’를 어중간하게 절충한 나이가 하나 더 있다. 해가 바뀌면 생일이 오기 전이라도 한 살 더 먹는 나이가 그것이다. 

아이는 2016년생이니 세는 나이는 여덟 살이다. 만 나이는 아이의 생일이 오려면 5개월 남았으니 아직 여섯 살이다. 만 나이에선 반올림이란 없고 버림만 있다. 생일을 꽉 채워야 한 살 더 먹는다. 그런데 일상생활 속에서는 만 나이를, 올해에서 태어난 해를 빼서 계산한다. 아이는 2023년-2016년=7살이다. 올해 생일이 지났건 지나지 않았건 ‘만 나이’는 7살로 통한다. 그래서 세는 나이로는 8살, 수학적 만 나이로는 6살, 일상적 만 나이로는 7살이다. 연금 수령이나 투표권 등 권리 행사할 때는 수학적 만 나이를 적용한다. 일상생활에서는 세는 나이를 말하고, 위아래를 따질 때는 ‘일상적 만 나이’를 내민다. 참으로 혼란스럽다.

정부는 그런 나이를 ‘만 나이’로 통일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게 될지는 미지수다. 각 나이는 쓰임은 물론 나오게 된 배경이나 담겨있는 철학이 다르다. 차라리 몇 살이냐는 물음 자체를 없애는 게 낫겠다. 몇 년 몇 월생인가? 혹은 ‘주민등록 앞 6자리를 말하시오’, 라고 하도록 하면 모를까. 

‘만 나이’일 경우 태어난 뒤 1년 동안은 0살이다. 이상한 셈법이다. 아이가 첫 생일(돌)이 되기 전 세상을 떠나면 아이에겐 나이가 없다. 0살이다. 0이란 그야말로 공이고 무다. 아이는 현실적으로는 존재했지만 나이상으로는 비존재다. 과학적이 아니라 관념적이다. 

유치원 애들이랑 살거야

다른 문제도 있다. 엄마 배에서 자라는 동안의 아이는 생명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태아도 엄연한 생명이고 같은 인간이다. 그런 태아를 물건이나 무생물 취급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존중하고, 숫자로만 계량하려는 피도 눈물도 없는 기계적이고, 수리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다. 그런 셈법이 확장 적용될 경우, 극단적으로는 반인륜 범죄, 반인간 반생명 범죄로 이어진다. 차별, 배제, 격리, 학살 등. 

게다가 만 나이의 경우 반드시 생일이 되어야 한 살을 올린다. 그러면 생일이 되기 직전까지 364 혹은 365일은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만 나이의 세계에서 우수리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고 보면 만 나이란 그렇게 엄격하지도 않고 수학적이지도 않다.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개인의 권리를 국가가 자의적으로 제한하는데 이용될 뿐이다. 

이에 비해 ‘세는 나이’는 매우 인간적이다. 아이는 태어남과 동시에 한 살로 인정받는다. 생명이 발아할 때부터 인간으로 인정받고 존중받는다. 사실 생명은 그 자체로 생명이다. 예비 생명 혹은 잠재 생명 혹은 미숙 생명이란 건 없다. 모두가 생명이다. 

나아가 ‘세는 나이’는 인간적이고 문학적이다. 엄마 아빠가 만나고 사랑하고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과정이 모두 포함돼 있다. 탄생의 연원과 배경 그리고 그에 얽힌 이야기는 인류의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상상력의 샘이 된다. 다만 수리를 거부함으로써 계량을 어렵게 한다는 문제나, 이에 따라 표준화된 사회에서 불공정을 초래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긴 하다. 12월 말일 태어난 아이는 단 하루 만에 두 살이 되고, 1월 1일 태어난 아이는 1년을 버텨야 두 살이 된다. 그로 말미암아 진학, 입대, 취업, 퇴직 등에서 이익 혹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골치 아프다.

우리 옛 어른들이 이런 문제를 잘 알면서도 ‘세는 나이’를 고집했던 것은 아마도 생명을 존중하고, 탄생의 신비 등 인문적 요소를 중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좀 혼란스러우면 어떤가. 그런 불편함보다 중요한 건 인간과 생명의 존귀함 아닌가?” 비과학적이라고 타박을 받을 순 있지만, 이렇게 인격적인 태도와 철학은 없다.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나이 대신, 12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띠를 묻고 답하는 것이 그것이다. 몇 살인가 묻기보다 무슨 띠냐고 물으면 예컨대 토끼띠라느니, 호랑이띠라느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60갑자 가운데 무슨 해에 태어났는지로 답한다. ‘계묘’생(2023년) 혹은 ‘임인’생(2022년)이라고 한다. 아이 아빠의 생년이 양력으로 1985년이긴 하지만, 12간지 육십갑자는 음력에만 있으므로 음력 1984년 갑자생 쥐띠다. 을축생 소띠가 아니다. 

할아버지가 제 장광설에 취했나 보다. 그나마 거기에서라도 그치면 좋으련만 할아버지는 가속페달을 밟고 비약하기 시작한다. 욕심이다. 

“할아버지는 올해 67살(세는 나이)이거든. 20년 뒷면 몇 살일까?”

“87살.”

지지리 궁상이던 산수였는데, 해가 바뀌어서 그런가? 아이의 셈이 제법이다.

“그때면 호호 할아버지 되겠네. 홍은동 마곡동 왕할머니들처럼 말이야.” 아이 눈이 동그래진다. 믿기지 않나 보다. 이 할아버지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귀도 잘 안 들리고,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꼬박꼬박 졸기나 한단 말이야?

“주원이는?” “28살.” 

“할아버지가 20년 후 증손주를 볼 수 있을까? 마곡동, 홍은동 왕할머니가 주원이 보는 것처럼?” 

“안 될 것도 없지, 마곡동 왕할머니가 아흔, 홍은동 할머니가 87살에 주원이를 봤으니까.” 

갑자기 아내가 불쑥 끼어든다. 허황된 결론으로 가는 걸 예감하고, 거기서 끊으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멈출 곰탱이 할배가 아니다. 고고!

푼수 할배의 장광설. 20년 뒤엔 나도 주원이 같은 증손녀 볼 수 있을까?

“그럼 주원이가 결혼하고 아기를 낳아야 하겠네. 주원이는 언제 결혼할까?” 

주변에서 아이고 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이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는 말이 없더니 잠시 뒤 생글생글 웃으며 한마디 한다. 

“나 결혼하지 않을 거야. 유치원 애들이랑 살 거야.”

아이는 제가 한 말의 뜻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푼수 짓 하는 할아버지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 것만은 아는 것 같다. 할아버지 등으로 기어 오른다. 목말 타고, 말달리기 하자고 할 차례다. 할 이야기가 따로 있지, 본전은커녕 낭패만 당했다.      

지난번 아이 학원 보내는 것에 대해 ‘버럭’ 하며 고집했던 것을 이 자리를 빌려 철회해야겠다. 학원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겠다. 

할아버지랑 안 놀아.

아이 예비소집 때 학교에서 보낸 서류 중엔 아이의 하교와 관련한 각서가 있더란다. 요컨대 수업이 끝나고 학교 문을 나서면서부터는 아이에 대해 부모님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입에 올리는 것도 무섭지만, 학교 문을 나선 뒤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는 학교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울러 학교는 교문에서 부모님이나 부모님이 정해준 사람에게 아이를 인수인계할 것이니, 부모가 데리고 가기 힘든 가정에서는 부모 대신 인수할 사람을 서면으로 통보해달라고 하더란다. 

살벌했다. 뭔 말씀을 그렇게 하실까. 인정머리라곤 머리카락 한 올 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학교가 탁아소나 보육원도 아니고, 아이들을 끝까지 책임질 순 없다. 게다가 아이에게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선생님을 들들 볶는 학부모, 여기저기 상급관청에 치이는 학교 현실을 생각하면, 미리 책임 소재를 분명하게 해두는 게 현실적일 법도 했다.

사실 맞벌이가 대세인 요즘 초등생의 하교 과정에서의 안전 문제는 심각하다. 특히 초등학교 1학년생의 경우 맞벌이 부모라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여력이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다면 만사형통이다. 하교뿐만 아니라 아이를 집에서 돌볼 수도 있다. 

그러나 조부모의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정말로 복잡해진다. 하교의 안전은 물론 하교 이후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아이를 돌보는 도우미를 구해야 한다. 그래서 요즘엔 하교만을 책임지는 초단기 도우미까지 생겼다고 한다. 이들은 아이를 학교에서 집까지 혹은 학교에서 학원까지 데려가 주는 구실만 한다. 이후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는 학원이 담당한다고 한다.

학원은 차량으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려오고, 이 학원이 끝나면 다른 학원에서 차를 보내와 아이들을 데려가고, 이렇게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아이를 맡아준다는 것이다. 아이는 부모가 데리러 올 때까지 학원에서 학원으로 뺑뺑이를 돌아야 한다. 그것이 그나마 가장 저렴하고 안전한 선택이라고 한다. 맞벌이 부모로서는 궁여지책이다. 아이가 클 때까지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할머니는 최고의 만능 선생님

사족이지만,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선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그 역할을 맡기는 것일 게다. 부모로서는 무엇보다 아이의 안전에 대해 안심할 수 있다. 학원에서 학원으로 뺑뺑이 돌면서 생길 수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한 걱정도 덜 수 있다. 아이는 아이대로 분리 불안에서 벗어나 안정되고 균형 잡힌 성품을 갖출 수 있다. 

그러나 요즘 대다수 조부모는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 우리나라 노인의 빈곤지수가 OECD 회원 국가 가운데 가장 높다. 손주 돌봄에 전념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조부모가 아이를 돌보면서 일정한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해결된다. 국가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아이 돌보미로 정식 고용하는 것이다. 예산 문제가 있다. 그러나 대책 없이 출산 장려에 쏟아붓는 예산 가운데 일부를 양육으로 돌리면 된다. 출산을 회피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맞벌이 부부의 양육 문제다. 주택이나 교육 문제보다 시급하다. 

조부모가 맡게 되면 아이 부모는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다. 경제적 부담도 크게 던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경제적 문제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가족의 안정성을 증진하고, 노년의 행복을 제고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정부로서는 노인 일자리 문제에 쏟는 비용도 줄이고, 노인 빈곤율 최악이라는 수치스러운 기록에서도 벗어나는 디딤돌을 마련할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아이야, 너만 믿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