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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O May 12. 2022

구멍 뚫린 양동이

네번째 편지 _ 신임소방관의 마음가짐

저는 일한 지 한 해도 넘기지 않은 신임 소방관입니다만,

제 소방 생활을 관통하는 단어는 ‘구멍 뚫린 양동이’입니다.

계속해서 채워줘야만 하는, 조그만 구멍이 뚫린 양동이. 


이 양동이를 두 손으로 집어 하늘로 들어보자면, 손가락 한 개만 한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소방관이 지녀야 할 소중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출동을 다녀오면 대국이 끝난 바둑기사처럼 방금 나갔던 출동을 한 번 더 복기해봅니다. 

처음 펌프차에 내려서 현장에 닿을 때까지를 찬찬히 머릿속으로 그려보지요. 

그러면 제가 잘못한 부분이나 부족했던 부분이 반드시 한 가지 이상은 나옵니다. 


지금 생각나는 것도 몇 가지 있네요.


이전에 나갔던 초등학교 화재 출동에서의 일입니다.

현장에 접근하기 전에, ‘조그만 랜턴이면 충분하겠지’ 하고 더 밝은 조명 장비인 제논 라이트를 펌프차에 두고 나왔습니다. 복귀 뒤에 센터장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화재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고, 보지도 않았는데 네가 제논 라이트가 필요할지 안 필요할지 어떻게 알아?”


다행히 화재는 크지 않았고, 제 헬멧에 장착된 랜턴으로 충분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의 선물이었을 뿐입니다. 센터장님의 말씀이 백번 맞는 말이었어요. 


만약 화재의 규모가 컸다면 조그만 헤드랜턴으로 앞을 비추기 턱없이 모자랐을 것이고, 그렇게 미숙한 준비를 하고 진입하면 자칫 위험한 상황에 놓였을 수도 있습니다.      

제논 탐조등과 헤드랜턴 / 출처: 소방방재신문


또 한번은 동물 출동을 나갔는데 그땐 로프 매듭이 미숙했습니다.


소방학교에서 그렇게 연습했던 매듭법인데 막상 현장에 나가니 더듬거리며 한참을 헤맸어요. 그때 현장에서 필요했던 매듭은 동물구조용 고정 매듭으로, 매듭을 지으면 크기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매듭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동물 출동을 나가면 고정 매듭으로 고리를 만든 뒤 목에 걸어 동물과 우리의 안전을 확보합니다. 그런데 현장에 있는 동물의 크기가 얼마인지 알 수 없으니 현장 도착 전에 매듭을 미리 준비했어도 풀어서 다시 묶어야 했습니다.


내용과 무관한 사진 / 출처: 인천소방본부 공단소방서


출동을 마치고 돌아온 뒤 선임 반장님이 현장에서 쓸 수 있을 만한 고정 매듭 묶는 법을 다시 가르쳐주셨습니다. 우선 매듭을 절반만 묶어두고 손으로 로프를 살살 달래면 원하는 크기를 금세 만들 수 있는 매듭법이었죠. 그렇게 매듭을 지으면 동물의 크기가 어떻든 그때그때 원하는 대로 매듭의 크기를 줄이거나 늘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마를 탁! 소리 나게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닝 크루거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효과를 설명할 때 나오는 그래프가 있는데, 좌측엔 ‘자신감’ 그리고 우측엔 ‘지식’이 적혀있습니다.
그래프 초기엔 지식수준이 높아질수록 자신감이 상승합니다. 아는 게 많아질수록 어깨가 으쓱거린다는 뜻이죠. 그런데 이 그래프는 지식수준이 일정 수준 높아지면 어째서인지 자신감은 하락합니다.
더 깊게 배울수록 본인이 얼마나 모자랐는지 깨닫고 오히려 겸손해진다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늘 ‘이 정도면 됐지’ 하는 수준을 경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항상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매듭법을 안다고 해서 그만이 아닙니다. 

매듭을 짓는 방법을 알면 그다음은 얼마나 빨리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20초가 걸렸다면 다음엔 15초, 그다음엔 10초로 더 빨리 단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현장에서 그 지식을 써먹는 건 아예 별개의 문제예요. 

실제로 제가 이것저것 물으면 구급대원 선임은 성심성의껏 가르쳐주지만

‘이렇게 해도 현장 나가면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배움과 현장 사이엔 괴리가 크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양동이엔 물이 조금씩 새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다시 그 양동이에 물을 채웁니다.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때문에, 하루하루 휘발되는 기억을 다시 붙잡고, 장기기억으로 보존시키기 위해 또 배웁니다.
이것이 제가 제 소방 생활을 구멍 뚫린 양동이로 비유하는 이유입니다.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몸으로 알아야 진정으로 ‘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열 번이 아니라 천 번을 해야 “나 그거 안다”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을 테지요. 

대개 연습하는 순간의 상황은 잘 정돈되어 있고, 호흡이나 주변 환경도 안정적인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현장은 시끄럽고, 주변은 어지러우며, 심장박동은 귀에 들릴 듯 크고 거칠게 뛰기 마련입니다.

이 순간에서 제가 원하는 대로 행동을 하려면 머리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전에 이미 몸이 움직이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저는 출동한 뒤 제가 부족했던 부분을 정리하고 머릿속을 채웁니다. 오늘도 제 머릿속에서는 약간의 배움이 채워지고 많은 배움이 빠져나갑니다. 손으로 막아도 배움은 모래알처럼 여기저기 새어나가기 마련입니다.


저는 막고 있던 손을 치우고, 다시 손을 뻗어 물을 채웁니다.
찰랑이는 소리가 양동이 너머로 울려 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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