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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준 Aug 28. 2018

라면을 끓이며

김훈 <라면을 끓이며>


맛은 정서적 현상이라기보다는 화학적 실체다. 달고 짜고 매운 맛은 다양한 식재료의 조합으로서 혀를 자극하여 음식에 대한 경험을 일깨운다. 그 중에서도 라면은 특히 조미료의 맛이 자극적이라, 장복을 하면 인이 박인다고 했다. 그 정도로 사람들이 라면을 많이 찾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이 배고픈 시절에 나타난 경이로운 행복감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끼니를 때우기 위한 그것의 편리함과 저렴함은 다른 것에 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라면은 매우 흔해졌고, 그것의 기능은 적당한 수준의 귀찮음과 스트레스의 해소를 위해 자극적인 맛을 제공하는 것에 가까워진 듯하다. 물이 끓는 동안 이번엔 뭘 더 넣어서 색다른 최적의 맛을 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동안,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와중에 소소한 행복을 찾을 궁리를 하는 모순된 감정에서, 갑자기 먹고 사는 일의 의미가 새삼스럽게 느껴져 문득 서러워졌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는 라면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밥, 돈, 몸, 길을 거쳐 글에 대한 소회로 끝나는 단편 에세지 모음집이다. 김밥과 라면을 소재로 삶과 일에 대한 짤막한 감상들로 퍼져나가는 그의 의식의 흐름은 결국 ‘손의 흐름으로 살아야 할 터인데, 손은 자꾸만 남의 손을 잡으려 한다’로 끝나는 듯 보인다. 홀로 작업하는 데서 오는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는 조금씩 일했고 많이 헤매었다고 전한다. 글을 쓰는 것보다 헤매기가 더 힘들어서, 방으로 돌아오면 원고지의 무수한 빈 칸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아무데서도 이런 식의 구성에 대해서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지만, 결국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의 일상과, 먹고 살기 위해 헤매었던 것의 의미를 풀어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생각해보면, 먹고 살기 위한 일에 대한 보편적인 시각은 라면천하였던 시절과는 달라진 듯 하다. 일의 의미가 생존을 위한 노동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위한 것으로 포장되기 시작하면서, 이제 직업을 갖고 일한다는 것은 흥미와 열정을 바탕으로 소명의식을 갖고 프로페셔널하게 '잘' 해야하며, 궁극적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결론이야 어쨌든, 일이 먹고 사는 것 이상의 주관적인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명제에는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부분은 매우 크다. 100세 시대에 사람이 일을 하며 보내는 시간은 그 중에 족히 절반을 능히 차지하고 남을 것이며, 그것의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그리고 그 중 대부분은 하루 24시간 중 알토란 같은 부위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은 나머지 시간은 생명활동을 유지시키기 위한 시간이 또 대부분이라, 어쩌면 일을 하기 위해 준비가 필요한 시간이 나머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람은 의지를 갖고 행동하기도 하지만, 또 행동에 따라서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방향성이 다르면 부조화를 느끼고, 이를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이는 마침내 자기합리화라는 놀라운 기제를 발현시켜서 사람이 사는대로 생각하도록 만드는데, 이를 인지부조화 해소 과정이라 한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일을 하면서 보내면, 인지부조화가 발생하고 이를 해소하는 과정을 통해 일에 대한 생각도 변하기 마련이다. 어떤 형태로든 일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인지부조화를 거쳐 그것의 의미를 부여당하고 마는 것이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소위 정신승리라 불리는 일련의 과정이다. 부조화 해소 욕구가 이끄는 노동에는 개인의 흥미나 열정이 끼어들 구석은 없다. 주입된 행위를 통해 바뀌는 생각은 언제나 가변적일 수 밖에 없고, 흥미와 열정은 이를 통해 만들어진다.


부조화 해소 욕구는 강력한 동기이지만, 도저히 그것으로도 해소할 도리가 없는 일들이 있다. 그 상태가 장기간 유지되면, 결국 직장은 돈 버는 곳이 된다. 해야만 하는 일들이 어떠한 가설로도 정당화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그것의 마지막 보루인 월급에만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최소한의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가족을 부양한다는 수단으로써의 노동은 결국 그것의 내용과 목적을 분리되게 만들고, 이제 그것은 일 자체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로 변질된다. 그렇기에 일에서 파생되는 인간관계에 집착하고, 자리보전을 위해 일어나는 정치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신기한 점은, 일의 의미가 오직 시간가치로 환산되는 월급의 양으로 정의되고, 그것의 내용과 관계없이 버텨야 하는 것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매체들은 이 과정을 아름답게 포장하곤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대부분 타인의 자본 증식을 위한 것인데, 이는 먹고 살기 위해 젊은 날의 시간과 월급을 교환하는 과정이고, 교환가치의 크기는 상대적인 대체가능성에 의해 결정되지만, 이는 젊은이들이 ‘아직 살아남지 못한 자’로서 생존을 위해 힘쓰는 삶의 애환 정도로 미화된다.


이런 과정 속에서 마침내 이를 인정하고 내면화하고 마는 이유는 불안 때문이다. 그것은 일을 그만두었을 때 겪게될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두려움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어진다. 노동을 통해 느끼는 감정은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자 하는 바람이 뒤섞인 어떤 것이다. 꼰대와 후배의 틈바구니에서 아둥바둥 재테크를 위한 종잣돈을 만들고, 그걸 굴리며 주식 차트를 보고, 갭투자를 위해 부동산 정보를 알아보고, 가즈아를 외치며 알트코인이 떡상하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궁극적으로 노동의 이면에서 오는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것이다.


인생의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하는 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다소 모순적이다. 물론, 먹고 살기 위한 노동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만은, 일이 갖는 주관적인 의미는 그 이상이었으면 한다. 생존을 위한 노동에 대해 체념하기보다는,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과정에서 필요한 일을 하고싶다.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고, 뭔가 쓸모 있는 것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과정이 나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고, 일의 관점에서 나를 정의해보려 한다. 


사실, 이런 방향성을 고민하는 과정의 끝에 약속된 미래라는 건 없는 듯 하다. 다만, 자기 만족이 있을 뿐이다. 달성하고자 하는 일의 목표가 나의 정체성과 결부되어 조화를 이루고, 나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와 세계를 바라보는 주관적인 해석의 방식이 나의 일에 반영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에 기반해서, 나는 어떤 일을 하고, 그래서 이건 왜 하고, 어떤 의미가 있고, 앞으로 뭘 할 건지를 말할 때, 자기합리화와 부끄러움 없이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하겠다. 결국엔 생각한 대로 살아도 그럭저럭 적당한 수준의 밥벌이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하는데, 아마 라면을 끓일 수 있을 정도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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