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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Vie Apr 16. 2021

시한부 2개월, 두 달이 지났다

두 달 산다는 아빠는 아직도 살아있다

2월 18일 종양내과 주치의는 내게 "환자분은요 두 달 못 살아요"라고 했다. 4월 16일 다행히 아직 아빠는 살아있다. 이틀이 모자라기는 하지만.


 내가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으면.."이라고 운을 떼자, 주치의는 고개를 저으며 "일반 병실에서 항생제 쓰면서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패혈증으로 돌아가실거에요. "라고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주치의가 그 말을 하는 순간에 내 시야에  아빠가 들어왔다. 수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어렵게 한 발 한 발 어렵게 병실로 들어가던 모습이었다. 지금은 저기 내 눈앞에 살아서 걷고 있는 아빠가 두 달이면 영원히 못 보는 사람이 된다니. 땅으로 온몸이 훅 꺼지는 기분이었다.


 아빠가 항암을 위해 입원한지 3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리는 이제 항암치료를 위해 첫 발을 내딛은 건데, 항암은커녕 곧 죽을지도 모른다니.  


 아빠 상태가 점점 나빠졌던 이유는 도에 천공이 생겼고, 그 천공 사이로 무균 상태여야 할 종격동 온갖 염증과 암덩어리로 오염이 됐다는 것이었다. 종격동을 넘어 폐까지도 염증과 암덩어리들이 퍼졌다고 했다. 암이 아니라 종격동염과 폐렴으로 곧 사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격동염의 치사율은 75%다.


 주치의는 그랬다. 서울아산, 삼성서울 대한민국 대형병원의 손꼽는 명의들을 데려와도 이런 케이스를 수술하겠다고 하는 의사는 없을거라고. 수술을 하지 못할 경우 항생제를 써서 버티다 결국 패혈증이 올 것이고, 패혈증이 오면 이틀 내에 사망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암센터 흉부외과 의사를 설득 중이지만 아마도 수술을 하지 않을거라는 회의적인 말도 했다. 아빠는 울먹이며 "살려주십시오"라고 빌었다.


  어안이 벙벙한 나는 차례로 전화를 돌렸다. 의사인 언니에게, 그리고 가장 걱정하고 있을 엄마에게.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병실로 돌아가 아빠를 봤다.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옆으로 쪼그려 누워있는 아빠에게 "나는 아빠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거라 생각하지 않아"라고 했다. 그리고는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라고 했다.


 그제야 아빠는 소리내 흐느꼈다. 살면서 아빠가 소리내서 우는 건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도 아빠는 빨개진 눈으로 눈물만 흘렸다. 하지만 한 10초나 지났을까? 아빠는 이내 흐느낌을 멈추곤 주위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신변정리를 했다.


 전화 건너편에서 '오랜만에 무슨 일이시냐'고 물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제가 오랜만에 전화를 드렸는데 좋은 일이 아니라 죄송하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연구실이나 학교 사무실, 강릉집 정리를 지인들에게 부탁하며 신변정리를 했다.  


 나는 눈물이 많은 편인데 그 순간엔 눈물이 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참았던 건지,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건지 잘 모르겠다. 한달음만에 달려온 언니와 엄마를 로비에서 만났을 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러고 50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흉부외과 교수가 우리 가족을 부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51병동 간호사실로 모였다.


 목에 걸린 출입카드에는 흉부외과 김문수라 써있었다. 치료를 받기 전 이것저것 찾아보다  암센터에서 수술을 잘하는 의사라는 것을 알곤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깊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후가 좋다고 장담하기 어려운 수술이고 굉장히 고민스럽다는 말도 거듭했다. 항생제를 쓰면서 상황을 지켜볼지, 아니면 위험부담을 안고 수술을 감행할지를 두고 고심 중이라고.


 아빠는 위험부담에도 수술을 하고 싶은 눈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빠는 교수에게 "어떤 선택지를 권해주고 싶으시냐"고 물었고, 교수는 "그건 당사자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지요. 하지만 가장 기본은 항생제를 쓰면서 상태를 지켜보는 것이죠"라 했다.


 나는 그 말의 행간에서 결국 수술을 포기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수술을 안하겠다는 말을 빙빙 돌려말하는 것이구나. 그래서 그 뒤에 교수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제대로 기억도 안난다. 아, 결국 의사는 수술을 포기하겠구나. 우리는 항생제만 쓰면서 기적을 바라야겠구나. 그렇게 교수가 떠나고 우리도 뿔뿔이 흩어져 아빠는 병실로, 언니는 종양내과 주치의 면담을, 엄마랑 나는 밥을 먹으러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흉부외과 교수와의 면담이 끝난지 한 30분이 지났을까, 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교수님이 수술 결정했다고 빨리 와서 가족들 동의서 쓰래."


 엄마와 나는 곧바로 병동으로 올라갔고 아까 봤던 김문수 교수가 간호사실에 앉아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안하고 환자를 잃느냐, 그래도 뭔가를 해보고 환자를 잃느냐. 그래도 뭔가를 해봐야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아빠가 2~3일 안에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땐 나지 않던 눈물이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망을 포함해 수술 후 생길 수 있는 부작용들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죽을 수도 있고, 평생 목소리를 못 쓸 수도 있고 등등. 하지만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술을 안하면 백퍼센트 죽는거였으니. 교수는 수술을 4시간 정도로 예상하고 있으며, 수술이 끝나면 보호자로 등록된 번호로 알림이 갈 것이라고 했다.


 30여분 뒤, 휠체어에 탄 아빠는 수술실 앞에 섰다. 수술실 문이 닫히고 피마르는 시간이 흘렀다. 수술이 너무 일찍 끝나면 손을 쓸 수 없어 빨리 닫은 것일테고, 너무 늦게 끝나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였다.다행히도 4시간 12분만에 내 휴대전화에는 수술이 끝났다는 국립암센터의 안내문자가 도착했다. 이 모든 일이 8시간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아빠는 중환자실로 올라갔고, 사나흘만에 일반병실로 올라갈 거란 주치의의 기대완 다르게 아빠는 꼬박 13일 동안 중환자실에 있었다. 그리고 일반병실에서 2주일을 회복했고, 퇴원했다. 물론 9일만에 항암 부작용으로 재입원해야했지만.


 이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2월 18일 주치의가 두 달밖에 못 살 거라 했지만, 오늘은 4월 16일이다. 수술이 끝난 뒤 주치의는 1~2년의 여명을 이야기했지만 그것 또한 아무도 알 수 없다. 난 아빠가 그보다는 오래, 은퇴 후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며 소박한 행복을 누리다 세상과 작별을 고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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