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요정 오소리의 요리하는 글쓰기 (10)
애초에 요리에 대한 글 같은 걸 쓰려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던지라 이 이야기를 끄집어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만, 돌이켜 보니 이 모든 요리 대장정의 시작은 카레에서 비롯되었다. 김치볶음밥을 먹고 체한 기억 때문에 10년 이상 김치볶음밥을 못 먹던 나에게 있어 카레는 자취생으로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요리였다. 마침 자취를 시작하는 시점에 인터넷에서 발견한 신기한 카레 레시피가 발단이 되어, 카레를 통해 요리의 즐거움을 알게 되면서 다른 요리에도 하나둘 도전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재료를 썰고 다듬고 조리하는 데서 오는 약간의 번거로움은, 일상에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온갖 스트레스에 비하면 기꺼이 감당할 수 있다고나 할까? 적어도 요리는, 어지간해서는 내게 상처를 주지도 않고, 정성을 쏟은 만큼의 정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까.
나를 요리의 세계로 매혹시킨 그때 그 카레의 레시피. 재료도 많이 들어가고 시간이 걸리는 만큼 각오가 필요하지만, 그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맛이므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의욕만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한 솥 끓여 놓고 두고두고 먹었기 때문에 대략 4-5인분 기준의 분량이다. (우유가 들었으므로, 식혀서 냉장보관 후 빠른 시일 내에 먹거나 소분하여 냉동보관해야 한다!)
재료 : 일본식 고형카레 1봉지 (4조각 큐브로 된 것 기준 2x4), 토마토 큰것 4-5개(방울토마토나 홀토마토로 대체 가능), 양파 큰것 2개, 감자 큰것 3-4개, 당근 큰것 1/2개, 고기 300g 이상(소/돼지/닭고기 어떤 것이든 뼈 없이, 지방 적게, 카레나 김치찌개 용으로 손질된 것이 조리하기에 편하지만 종류가 중요하진 않다), 우유 500ml, 마늘 3쪽 혹은 3-4쪽 분량의 다진 마늘, 버터 약간
+ 옵션: 월계수잎 4-5장, 오레가노, 다크초콜릿 소량. 감자를 고구마로 대체하거나 감자/고구마를 1:1로 섞으면 단맛이 더해집니다.
0. 모든 재료를 손질한다.
- 고기는 소금, 후추로 간을 해서 재워 둔다.
- 양파는 반 갈라 가늘게 채썰거나 다진다. 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볶아야 하므로 예쁘게 썰지 않아도 된다.
- 감자, 당근은 껍질을 까서 직경 2cm 정도로 깍뚝썬다. 고구마를 쓸 경우 고구마도 마찬가지.
- 토마토는 직경 1cm 정도로 잘게 썰어준다. 카레에 토마토 껍질이 돌아다니는 게 싫다면 십자로 칼집을 낸 다음 끓는 물에 데쳐서 껍질을 벗기면 된다지만 그런 짓은 해 본 적이 없다. 믹서기에 싹 갈아버리는 방법도 있으나, 그렇다고 토마토주스를 쓰면... 안된다. 생토마토를 갈아놓은 엑기스라면 사용해도 무방하다.
1. 데워진 냄비에 버터를 녹인 다음, 중불에서 양파가 달달한 냄새가 도는 갈색의 죽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저어주며 볶는다. 캐러멜라이징은 팔 근육 단련은 물론 정신 수양에도 좋다. 배가 고파 이성을 잃기 직전일 경우에는 양파의 깊은 단맛을 어느 정도 포기한다는 전제 하에 센불로 후다닥 볶아도 무방하다.
2. 양파를 잠시 덜어내고, 냄비에 고기를 볶는다. 고기는 충분히 데워진 팬에서 센불에 볶아 표면이 갈색이 되어야 마이야르 반응이 일어나며 불맛이 살아난다.
* 2번을 생략하고 3번으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고기의 깊은 맛을 끌어내려면 꼭 필요한 과정이다. 카레에서도 중요한 건 레이어를 쌓아올려 만드는 맛의 밸런스다.
3. 2에 볶은 양파, 감자, 당근, 토마토를 넣고 살짝 소금간을 한 다음 중불에서 살살 섞어준다. 야채에서 수분이 나오면서 끓기 시작하면 조각낸 고형카레를 넣어 녹인다. 월계수잎 몇 장(생략 가능)을 추가하여, 감자와 당근이 푹 익을 때까지 바닥이 눌어붙지 않도록 중불에서 저어 가며 끓여 준다. 이 과정 역시 정신수양에 좋다.
* 감자와 당근을 볶아서 조리할 경우에는 부드러움보다 아삭한 맛이 강해지므로 해당 레시피에서는 감자, 당근의 볶는 과정을 생략한다. 그래야 야채스톡이 나오면서 카레 육수가 진해지고, 감자와 당근은 보드랍고 포근한 맛에 가까워진다. 물렁한 당근을 싫어할 경우 당근만 볶는 것을 추천하지만, 감자는 볶으면 안 된다.
4. 농도에 따라 우유를 조금씩 부어 가며 간을 본다. 우유를 넣음으로써 카레의 짠맛을 완화시키고 진한 부드러움을 더해준다. (미리 넣으면 타 버리므로) 마지막 단계에서 후추를 듬뿍 넣어준다. 로제 소스 비슷한 부드러운 상큼함에 양파의 깊은 단맛, 야채스톡의 건강한 맛, 고기의 감칠맛과 카레의 풍미가 더해진 복합적인 맛의 레이어가 느껴진다면 완성. (다크초콜릿 약간을 넣어 녹여주어도 좋다. 설명 불가능한 풍미를 더해준다)
5. 먹을 만큼 덜어 오레가노를 뿌려 준다. 밥이나 빵과 함께 먹는다.
인생에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라곤 연애 뿐이라고 생각했던 시절, 일평생 단 한가지의 음식만 먹어야 한다면 주저없이 카레를 먹겠다는 사람을 만났었다. 그의 눈에 비친 나의 눈을, 거울 속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하는 황홀함이 사랑인 줄만 알았다. 서로의 이야기에 밤새도록 귀를 기울이던 가운데, 마음과 마음이 맞닿아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음에 한없이 기뻐하기도 했다. 내가 만든 카레를 함께 맛보며 행복해하는 그 순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숟가락을 내려놓고 밥상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제 갈 길을 갔고 나도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모든 기억은 카레를 젓다가 싱크대에 내려놓은 국자가 남긴 노란 얼룩마냥 서서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카레를 평생 먹을 수 있는 사람, 아니 평생 한 가지 음식만 먹을 수 있는 인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그 무엇도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음을 안다. 그래서 오늘도 카레에 방울토마토를 넣을지 홀토마토를 넣을지, 오레가노를 몇 꼬집이나 뿌릴 것인지 결정하기 위한 깊은 사색에 빠질 예정이다. 마치 그것이 일생에서 그 무엇보다도 가장 숭고하고 중대한 결정이라도 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