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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오소리 May 01. 2021

썰어라, 끝이 보일 때까지: 비나그래찌를 만들어 보자

집밥요정 오소리의 요리하는 글쓰기 (12)


요리는 오감을 골고루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활동이다. 재료를 바라보고, 고르고, 다듬고, 냄새를 맡고, 맛보기까지. 썰고 끓이고 먹으면서 생겨나는 ASMR 음향은 덤이다. 적어도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에 몰두해서, 원하는 결과(맛)가 나오기까지 몰두하는 시간만큼은 다른 생각들을 잠시나마 미뤄둘 수 있기 때문이다. 유난히 시각에 치우친 인간이다 보니, 요리의 수많은 과정 중에서도 알록달록한 채소 썰기를 가장 좋아하는 편이다. 바꿀 수 없는 상황에 얽매여 무기력함을 느낄 때면, 컬러테라피 차원에서 이따금 비나그래찌(구운 고기와 궁합이 좋은 상큼한 브라질식 채소 요리, 피클과 샐러드의 중간 느낌)를 만들곤 한다.


재택근무로 인해 집에 갇혀 지내던 차에 나의 손 끝에라도 자유를 주어야겠다 싶어 작정하고 장을 보러 간 어느 날, 1인 가구 주제에 채소와 과일을 5만원 어치나 사 버렸다. 비나그래찌에 쓸 최소 단위였음에도 엄청난 양이었다. 방울토마토 1팩, 파 1단 같은 셀러리, 손질한 양파 2알, 파프리카 2개, 오이 3개, 병에 든 블랙 올리브, 레몬 3알, 바질 잎 파우더, 그리고 아보카도 4개, 샹그리아에 쓸 자몽 1개, 사과 1개까지. 많이도 샀다 정말-   




컬러테라피를 위한 비나그래찌 만들기: 저 위의 재료 중 일부를 사용했음에도 1인가구 기준으로 매 끼니 반찬으로 먹을 경우 10번은 너끈히 먹을 분량이다. 요리 특성상 냉장보관시 4-5일까지도 두고 먹을 수는 있으나, 다 먹기 전에 인내심의 한계를 겪을 확률이 다분하므로 가급적 다량으로 만들어 지인들에게 소분하거나 함께 식사하면서 먹는 것을 추천한다.    


방울토마토 400g (500g 한팩을 다 쓰면 너무 많다, 일반 토마토로 대체 가능)

파프리카 1/2개 분량 (다양한 색상을 내기 위해서라면 주황 1/4, 노랑 1/4개 정도)

중간 사이즈 오이 1 1/2개

셀러리 1 1/2줄기

블랙 올리브 (슬라이스되지 않은 것 기준으로 15알 정도, 특유의 향과 짭짤함이 있으므로 취향에 따라 가감한다)

양파 1/4개

올리브유, 레몬 1개 분량의 레몬즙(Lazy lemon으로 대체 가능), 소금, 후추, 바질 잎 가루

옵션: 바질 잎사귀


0. 재료 손질

손끝에 닿는 재료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깨끗하게 씻고, 다듬고, 썰기에 집중한다. 오감을 활용할 수 있어서 정신수양에 도움이 되는 가장 즐겁고도 중요한 과정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씻고 다듬고 썰기 작업에 몰두하고 나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방울토마토는 반으로 갈라 볼에 담아둔다. 양파는 잘게 다진 뒤 찬물에 담가 매운맛을 제거한 다음 건져낸다. 셀러리는 잎 부분을 제거하고 줄기를 사용하는데, 너무 굵은 부분은 세로로 반으로 갈라 5mm 간격으로 썰어준다. (슬라이스 된 것으로 구입하면 편리하지만, 칼질이 목적인 요리인지라 알알이 들어있는 올리브를 구입했으므로) 블랙 올리브는 가로로 3-4등분 해서 중앙에 동그란 구멍이 있는 형태로 썰어준다. 파프리카는 반으로 갈라 뭉쳐 있는 씨와 하얀 부분을 다듬고, 오이는 껍질을 벗긴 뒤 세로로 길게 4등분해서 씨 부분을 발라내고, 직경 1cm 전후로 썰어준다. 가지런하게 썰어놓은 재료를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1. 버무리기

0번에서 썰어 놓은 재료를 한 데 담아, 소금 후추로 간을 하고 올리브유와 레몬즙, 바질 파우더를 뿌린 뒤 버무린다. 생 바질 잎도 추가하면 한층 더 신선함이 살아난다. 버무리기 과정에서 추가하는 재료의 분량은 취향에 따라 가감한다.


채소의 신선함과 허브 향을 살려주는 적절한 짭조름함, 올리브오일의 부드러움 그리고 레몬의 상큼함이 어우러졌다면 해당 단계에 성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금간으로 인한 삼투압 작용으로 인해 어느 정도 국물이 발생하나, 그와 관계없이 채소 내용물의 아삭함은 유지되기 때문에 국물을 버릴 필요는 없다.

Tip: 뚜껑이 있는 락앤락 용기 등에 내용물을 담고, 뚜껑을 덮은 뒤 거칠게 흔들어 주면 섞기도 수월할 뿐더러 스트레스도 해소할 수 있다.


고기와 함께 먹으면 제일 좋습니다 :D



나의 부엌에서 스스로 만들어 가는 자유로움과 작은 행복은 손 끝에서부터 온다. 장을 봐 온 야채들을 꺼내 늘어놓았을 때만 해도 이 많은 걸 언제 다 다듬고 썰어놓으려나 싶지만, 딱 30분만 집중하면 마침내 더 이상 썰어야 할 것이 없는 상태가 온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싶을 만큼 계속되는 칼질도 결국 반드시 끝이 있고, 애쓴 덕분에 먹을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마음대로 함으로써 주도권을 회복하는 성취를 통해 다시 힘을 얻고 차츰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창조적 활동을 통해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는 요즘, 인간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인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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