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숨이 멎는 느낌. 이 사람은 다르다. 이 사람은 진짜다. 말 한마디에 세계가 열리는 경험.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가 아니라, "저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는 감정. 순수한 존경 내지는 경외에 가까운 감정이다.
회사 선배였을 수도 있고, 업계의 유명인이었을 수도 있다. 책의 저자였을 수도 있다. 당신은 그 사람의 글을 읽고, 강연을 찾아보고, 인터뷰를 전부 읽었다. 그 사람처럼 생각하고 싶었다. 그 사람처럼 일하고 싶었다. 그 사람이 추천한 책을 사고, 그 사람이 쓰는 도구를 따라 쓰고, 그 사람의 말투까지 닮아갔다.
당신은 이것을 '배움'이라고 불렀다.
맞다. 처음에는 배움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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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거리가 좁혀졌다.
직접 만나게 됐다. 혹은 같은 팀이 됐다. 혹은 그 사람의 일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생겼다. 멀리서 빛나던 존재가 눈앞에 왔다.
그리고 당신은 보기 시작한다. 보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그 사람도 실수를 한다. 그 사람도 정치를 한다. 그 사람도 윗사람 앞에서 웃는다. 그 사람의 아이디어가 사실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 사람이 회의에서 한 말이, 당신이 지난주에 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도 있다.
'뭐야. 다 똑같네.'
이 한마디가 머릿속을 스친 순간, 모든 것이 바뀐다.
존경이 무너지는 게 아니다. 존경의 종류가 바뀌는 것이다. "저 사람은 나와 다른 차원의 존재다"에서 "저 사람은 나와 같은 차원에 있다"로. 올려다보던 시선이 수평이 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비교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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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지라르는 이 전환을 정확히 설명했다.
멀리 있는 모델을 지라르는 '외적 매개'라고 불렀다. 당신과 모델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거리가 있는 상태. 돈키호테가 기사 소설의 영웅을 흉내 내는 것과 같다. 동경은 있지만, 경쟁은 없다. 돈키호테는 아마디스 데 가울라를 질투하지 않는다. 너무 멀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세계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당신이 멘토를 처음 만났을 때가 이 상태다. "이 사람은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그래서 안전했다. 순수하게 존경할 수 있었다. 배울 수 있었다. 모방하되, 충돌하지 않았다.
그런데 거리가 좁혀졌다. 당신이 성장했거나, 그 사람이 가까이 왔거나, 혹은 그 사람의 민낯을 보게 됐거나. 이유는 다양하다. 결과는 하나다. '외적 매개'가 '내적 매개'로 전환된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이 사람은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가 "이 사람은 나와 같은 세계의 사람이다"로 바뀌는 순간, 존경은 경쟁이 된다.
같은 세계에 있다는 것은, 같은 것을 놓고 겨룰 수 있다는 뜻이다. 같은 직위, 같은 인정, 같은 기회, 같은 평판. 아까까지 동경의 대상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나와 같은 파이를 나눠 먹는 경쟁자가 된다.
이것이 멘토가 괴물이 되는 메커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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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자.
당신은 멘토에게 배웠다. 열심히 배웠다. 그 결과, 실력이 올라갔다. 멘토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여기까지는 아름다운 성장 서사다.
그런데 실력이 비슷해지는 순간, 이상한 일이 생긴다.
멘토가 당신의 성과를 예전처럼 칭찬하지 않는다. 회의에서 당신의 의견을 슬쩍 무시한다. 당신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면, 멘토가 묘하게 불편한 표정을 짓는다. 예전에는 아낌없이 조언을 줬던 사람이, 갑자기 말이 줄어든다.
당신은 혼란스럽다. "내가 뭘 잘못했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문제를 찾자면 당신이 성장한 것이 문제다.
멘토도 인간이다. 멘토에게도 모방 욕망이 작동한다. 당신이 멀리 있을 때, 멘토는 안전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역할이 분명했다. 위계가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올라오면, 그 위계가 흔들린다. 멘토의 자리가 위협받는다. 멘토는 자신도 모르게 당신을 경쟁자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다. '다 똑같네'라고 느낀 순간, 당신 안에서도 무언가가 작동한다. 존경 뒤에 숨어 있던 비교 본능이 깨어난다.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저 사람이 받는 인정을, 나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생각을 존경이라고 포장하기엔, 속에서 타오르는 열기가 너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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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이 특히 잔인한 이유가 있다.
멘토와 멘티 사이에는 감정적 부채가 쌓여 있다. 당신은 이 사람에게 배웠다. 이 사람 덕분에 성장했다. 고마운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을 질투한다. 이 두 감정이 동시에 존재한다.
고마움과 질투. 존경과 경쟁심. 배우고 싶은 마음과 이기고 싶은 마음. 이것들이 뒤엉켜서, 당신은 자기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된다.
"나는 이 사람을 존경하는 거야, 질투하는 거야?"
답은 둘 다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이다. 모방 욕망은 존경과 질투를 동시에 만들어낸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개의 가지다. 당신이 누군가를 깊이 존경할수록, 그 사람과 거리가 좁혀졌을 때의 질투도 깊어진다.
존경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의 승진에는 흔들리지 않는다. 질투의 강도는 존경의 깊이에 비례한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가장 격렬한 질투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지라르가 밝혀낸 잔인한 공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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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식은 역방향으로도 작동한다. 멘토 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자.
좋은 멘토는 멘티의 성장을 바란다. 진심으로. 하지만 멘티가 자기만큼 올라오는 순간, 멘토의 무의식에서 경보가 울린다. "이 사람이 나를 추월하면?" 멘토는 이 경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면 자기가 나쁜 사람이 되니까. 대신, 다른 형태로 표출한다.
조언이 비판으로 바뀐다. "네가 아직 모르는 게 많아." 칭찬이 견제로 바뀐다. "좋긴 한데, 이건 좀..." 가르침이 통제로 바뀐다. "아직은 내가 결정할게."
당신은 이것을 멘토의 성격 탓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좀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혹은, 자기가 뭔가 잘못해서 실망시켰다고. 자책한다.
둘 다 아니다. 구조가 만든 결과다.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가르침의 관계'가 '경쟁의 관계'로 전환된 것이다. 멘토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당신이 부족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모방 욕망이 두 사람 사이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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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직장 생활을 돌아보자.
한 명쯤 떠오를 것이다. 처음엔 존경했다. 이 사람 밑에서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관계가 묘하게 불편해졌다. 뭐가 잘못된 건지 정확히 집어내기 어렵다. 그냥 예전 같지 않다.
혹은 이런 경우도 있다. 당신이 멘토였던 경우. 후배를 열심히 키웠다. 그런데 그 후배가 빠르게 성장하니까, 묘하게 불편하다. 기뻐해야 하는데, 기쁘지만은 않다. 이 감정을 인정하기 싫어서, 더 엄하게 군다. 혹은 거리를 둔다.
어느 쪽이든, 원리는 같다.
거리가 좁혀지면, 존경은 경쟁으로 변한다. 이것은 인간의 결함이 아니라, 모방 욕망의 구조적 작동 방식이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멘토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이 구조를 모르면 두 사람 모두 상처를 입는다. 멘토는 '배은망덕'이라고 느끼고, 멘티는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서로를 탓한다. 관계가 파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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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존경은 불가능한 것인가. 배움은 항상 질투로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해법은 있다. 4부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핵심만 먼저 말하겠다.
지라르는 '좋은 모방'이 존재한다고 했다. 좋은 모방이란, 대상이 아닌 존재 방식을 모방하는 것이다. 멘토의 직위를 원하는 게 아니라, 멘토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는 것. 멘토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게 아니라, 멘토처럼 사고하는 법을 익히는 것.
이 차이가 전부다. 하지만 이 차이를 유지하는 것은, 구조를 모르면 불가능하다.
지금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다. 멘토를 향한 감정이 변했다면, 그것은 배신이 아니다.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거리가 좁혀진 것이다. 그리고 거리가 좁혀지면, 모방 욕망은 자동으로 모드를 전환한다. 동경에서 경쟁으로. 존경에서 질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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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에서는 이 경쟁이 집단 차원으로 확대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본다. 모두가 같은 것을 원할 때, 모두가 '공정함'을 외칠 때, 왜 그 외침이 오히려 당신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