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악한 인간의 민낯에 익숙해져버린 누군가를
물론 나를 눈물 짓게 한 날들이 있었지만
어찌 보면 그 순간들은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정도의 에피소드였다.
하지만 오늘 얘기할 내용은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는 아닐 수 있다.
"내가 싫다고 했지!!!!"
쨍그랑!
빈 맥주잔이 불판 위에 부딪힌다.
정적이 흐르고 분위기가 싸하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지금은 없어진 병원이니 조금 더 편하게 이야기해도 될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A병원을 담당하던 나는 약을 해당 병원에 넣기 위해 노력했고, 별 탈 없이 원내 코드를 잡게 되었다.
앞으로 새롭게 처방이 나올 약이니 개괄적인 약에 대한 소개와 주의 사항 등에 대한 설명회를 갖고,
과의 교수님들과 외래 간호사 몇 명이 함께 하는 저녁 식사 자리였다.
나는 병원을 같이 담당하는 다른 팀 선배와 함께 식사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외래 간호사 선생님 한 명이 과에서 중간 위치에 있는 교수에게 술을 권한다.
"교수님~ 오랜만에 다 같이 모였는데 한 잔 하세요!"
"됐어요. 안 마셔요"
"아 왜요~ 한잔하세요~"
"싫어요"
"그러지 말고 한잔하세요"
"내가 싫다고 했지!!!! "
어느 포인트에서 화가 많이 난걸까... 솔직히 이해되지 않았다.
뭐 원하지 않는 술을 재차 권하면 조금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라면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거나 그래도 권하는 사람에게는 조금은 정색하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표현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서로 알아듣지 않을까..
백번 양보해서 "싫다고 했지!"라고 소리지르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근데 앞에 놓인 맥주잔을 화로에 던지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식당의 화로가 테이블보다 깊게 아래로 파인 구조라
던진 맥주잔이 깨져도 파편이 위로 튀지 않았다는 정도일까.
더 놀라운 것은 다음 장면이었다.
나는 사과할 줄 알았다. 순간의 감정을 참지 못하고 화로 표현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사과하거나
혹은 지나친 무례함을 느닷없이 마주친 상대가 화를 낼 줄 알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과장은 화를 낸 교수를 데리고 잠깐 나갔다 왔고
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있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교수는 원래 자리에 앉아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가 이어진다.
충격이었다.
얼마나 많은 반복이 있었길래 모두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도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방금 상황은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것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내가 저 앞에 있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야햐 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내가 나서서 왜 이러시냐고 한마디 해야 했을까?
아니면 봉변을 당한 간호사 선생님을 위로해야 했을까?
문제를 제기하기에는 나는 일개 담당자라는 생각과 위로를 받는 사람이 혹시나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나는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이 일을 기록하는 이유는
그 날 그렇게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한 나에 대한 반성은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그 순간이 온다고 한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래도 그 일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싶다.
그리고 글이 그 사람에게 닿는다면 아니면 아무 거리낌 없이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닿아 조금이라도 뜨끔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