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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홍 Oct 24. 2024

[2년차]3.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기로 했어

눈엣가시 같은 동료를 대하는 자세

모든 직장인에게 일하면서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사람'이라는 대답을 할 것이다. 

'업무' 자체의 난이도는 쉽게 나의 감정선을 건드리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개입되는 순간 이성과 합리를 넘어서는 감정의 문제로 이어지기에 십상이다. 


영업부에 있으면서 장점은, 

같은 영업소 안에 설령 나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매일 사무실 출퇴근을 하면서 봐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빡침'의 빈도가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사람의 부정적인 기운 역시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르는 것인지, 

낮은 빈도를 강한 강도로 보완하며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또 하나 영업부에 소속되어 있을 때의 특징은

목표가 영업부에서 영업소로 뿌려지고 

궁극적으로 그 목표를 팀을 이루는 구성원들이 영업소 내 목표를 '나누어' 갖는다. 

이는 제약영업뿐만 아니라, 모든 '영업'을 하는 부서라면 공유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목표에 대한 최종 결정은 영업소의 소장이 내린다. 


여기, 만년 차장이 한 명 있다. 

동기들은 대부분 소장을 달았거나, 능력은 되지만 소장을 달지 못한 사람들은 새로운 자리를 찾아 이직했다.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은 소위 말하는 Big 5 병원 중 세브란스, 서울대, 아산처럼 엄청난 압박감을 주는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지만 동시에 본인의 가치와 능력을 뽐낼 기회를 잡았다. 

5~6전까지 서울대를 담당했지만, 이제는 일산 지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일산은 내가 꽉 잡고 있다'를 입버릇처럼 말한다. (실제로는 '내 나와바리다'라고 말씀하셨다)

설령 그 길이 요원할지라도 아직 소장의 꿈을 버린 것도 아니고, 

소장을 달지는 못하더라도, 매년 받는 인센티브와 직결된 평가에 대한 욕심은 절대 내려놓을 수 없기에 

평가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소장과 잘 지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문제는 그 '노력'이 업무와 연관된 카테고리보다는 '인간관계'로 통용될 수 있는 무언가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차장으로 소장을 입안의 혀처럼 굴며 '모신' 과거의 7,8년을 기반으로, 이제는 척하면 척하는 사이였다. 소장과 차장으로 7,8년이지 같은 영업부 식구로는 15년 이상을 보냈으니 친구 같기도 형 동생 같기도 한 그런 사이었다. 차장 마음에는 소장이니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과 동시에 본인이 자초한 일이지만 입안의 혀처럼 굴면서 쌓여왔던 감정을 선을 넘을락 말락 하는 소장님을 대상으로 둔 장난이나 말꼬리 잡기 등 시시한 방식으로 표출했다. 어쨌거나 그 사람은 그냥 그렇게 가신처럼 소장님 옆 '오른팔'로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확인받는 모습이었다. 



상사와 잘 지내는 것 또한 직장인의 미덕이며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직장은 아무리 개인의 능력이 뛰어날지라도 '집단'에 속해서 일하는 것이고, 

나와는 다른 사람과 어우러져야 하는 것인데 꼿꼿한 각목처럼 구는 것 보다 

인간적인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은 중요하다. 


다만 그 정도가 본업이 아닌 직장 내 관계 유지가 메인이 되어 타인의 곱지 않은 시선을 초래하지 않도록, 혹은 본인의 스트레스 지수를 높여 자신을 갉아먹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나 상사와 잘 지내고자 하는 노력이 본인의 스트레스 지수를 높여 자신을 갉아먹을 수준이 될 때,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맹목적으로 내려놓았던 자존심과 자아가 고개를 드는 어느 날 우습지도 않게 폭발하며 돌이킬 수 없게 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만년 차장의 자존심이 술의 기운을 빌려 상상도 할 수 없는 타이밍에 모두를 싸하게 만들었다가 이성을 부여잡고 또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구는 어느 날을 함께 하게 되었다. 


회사 근처 어느 가맥집에서였다. 늦봄~ 초여름 사이라 우리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포장마차에서 볼 수 있는 테이블을 빙 둘러앉은 우리는 여느 때처럼 치킨과 맥주를 곁들여 한 주의 고단함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소장님은 그 기회를 빌어 하고 싶은 얘기가 많으셨던 것 같고 

소원들은 장단을 맞춰 주려고 열심히 듣는 척을 하며 앉아 있었다. 

자리가 어느정도 마무리되고 

만년 차장이 술기운에 회사 회식비로 정산해도 되는 것을 굳이 가위바위보로 정하자고 한다. 

소장님이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에 다른 후배들에게는 무엇을 낼지 서로 맞춰둔 상태이다. 

만년 차장은 그간의 설움을 조금이라도 소장을 골탕 먹이며 덜어내고 싶었던 것 같다. 

여지없이 가위바위보에 진 소장님은 이미 누가 이런 시답잖은 장난을 쳤는지 안 봐도 뻔했고 

그날 심각한 얘기를 주야장천 했는데 정신 못 차리고 장난이나 치는 소원들을 보니 답답했나 보다. 

"야, 너네들은 진짜 생각이 없냐?"

분위기가 싸했다. 가뜩이나 나는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괜히 만년차장 얘기를 듣고 다 같이 보자기를 내는거에 동참한것 같아 후회막심이었다. 

다들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는 기미를 보여도 모자를 판에 만년 차장이 갑자기 툭 한마디를 한다.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래요! 

게"


쪼잔하게... 누구한테 들어도 좋지 않을 표현이다. 

화가 난 소장은 그 길로 찬바람을 쑁 ~ 일으키며 한마디 없이 카운터로 갔다. 

분위기가 정말 숨 막혔다. 그냥 집에 간다고 할걸...다시 후회를 곱씹는다. 

소장님이 가방을 가지러 테이블로 돌아오는데 돌연

"잘못했습니다"

만년 차장이 가맥집 야외 테이블과 맞닿아 있는 도보에 무릎을 꿇는다.

나는 평생 무릎 꿇으며 하는 사과는 TV에서만 보았다. 

사실 그 이후 일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만년 차장의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후회하는 것 같기도 한, 잘못을 고하는 것 같지는 않은 표정과 

무릎을 꿇으며 잘못했다고 말하는 행동이 어찌나 이질감이 느껴지는지 

그날의 그 이질감이 어떤 촉감으로 남아 기억날 뿐이다. 


그 이후로도 나는 여전히 만년 차장의 시답잖은 장난으로 눈치 없이 굴며 분위기를 망치는 모습에 

넌덜머리를 쳤고, 더 나아가 그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모두가 그 차장을 싫어하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고 우리는 일종의 혐오로 유대감을 쌓았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다른 회사에서 경력으로 입사한 과장님이 

신기하게 어느 날부터 만년 차장을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나는 과장님께 물어보았다. 

"과장님, 과장님은 어떻게 X차장님하고 잘 지내시는 거에요?"

"XX야. 나는 X차장님을 사랑하기로 결심했어" 


사랑, 이 얼마나 인류애적인 표현인가. 

과장님의 설명은 이러했다. 

하는 모든 행동이 밉다가 그 미운 행동 하나하나를 보고 있는 게 너무 괴로워져 생각하게 되었는데 

만년 차장에 아이는 셋, 외벌이, 걱정되는 미래.. 

그 차장이 짊어지고 있는 고민의 무게를 생각하니 그가 불쌍해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연민의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는 눈으로 보게 되니, 미운 것도 싫은 것도 옅어졌다더라. 


나는 그 당시에 과장님의 얘기를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냥 과장님이 대단해 보였다. 

'정말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구나, 과장님은' 하며 넘겼다. 


10년을 사회생활을 하며 순간순간, 만년 차장의 모습과 그 과장님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만년 차장의 모습은 언젠가 모두의 모습이 될 수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해왔지만, 기회라는 것이 나에게 반드시 오는 것은 아니니, 

내가 원치 않아도 그냥 머무르는 그냥 그런 사람이 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저 내가 하는 오늘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기를, 켜켜이 쌓인 나의 노력이 기회에 닿기를 바랄 뿐.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는 과장님의 한 마디는 알게 모르게 내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었나보다. 

그의 표현에는 연민과 사랑의 마음과, 그 마음으로 상대를 보리라는 결심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데 게다가 내가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이고 그 원인이 특정 사람에게 있을 때 매우 유용한 '나를 지키는 방법' 중에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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