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 같다는, 들어본 적 없는 수식어를 듣고 났으니 그럼 독사 같은 모습을 보여줘야지! 하며 의욕 뿜뿜 영업부 2년 차를 맞이한 나의 계산에는 나름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나만의 무기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모두에게 지급되는 무기이긴 했다.)
그해 회사에서는 신약을 출시할 계획이 있었으며 신제품을 내가 담당하는 병원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킨다면, 조금 더 빠르게 목표 달성의 안정권에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출시된 신약을 3차 병원에서 처방하기 위해서는, DC(Drug Committee)라는 별도의 process 통과가 필요하다. 병원마다 열리는 시기는 다르며 분기에 한 번 열리는 경우도 있고, 격월로 열리는 경우도 있으며 1년에 2번만 열리는 경우도 있다. 또한 병원별로 각 과별로 DC에 올릴 수 있는 약의 개수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해당 약을 주로 처방하는 main과 내에서 DC접수에 우선순위를 부여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선순위를 부여받는다'라는 표현을 좀 더 날것 그대로 한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어쨌든 우리 회사의 약이 DC에 통과할 수 있도록 해당 과의 과장님의 약속 같은 것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사실 뭐 약속이라는 게 서로 서면으로 뭔가를 작성해서 공증을 받을 것도 아니고,
인간과 인간 간의 신뢰를 기반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나는 신입사원 시절 팩 소주를 당기게 했던 사건을 생각하며,
'그래, 아무리 내가 본인(그 당시 담당 과의 과장)을 만나러 오는 나의 속이 뻔히 보인다 할지라도, DC를 앞두고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보다 적어도 나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 DC 관련해서 부탁드릴 때 조금이라도 나 스스로 덜 민망해야지'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했다.
과장은 입이 정말 고급인 사람이었다. 대부분 그냥 병원 근처 맛집, 조금 더 나가면 소고기 뭐 이런 수준이라면 이 사람은 OO 호텔 중식당 그리고 거기서도 제일 비싼 불도장을 시킨다.
뭐 이 사람이 한 행태들이 갑질의 끝판왕은 아니지만 뭐랄까.. 너무 옹졸했다.
어떤 규정을 넘어서는 요청은 절대 하지 않지만,
그 규정 내 허용되는 것들을 싹싹 긁어 게걸스럽게 먹는 스타일이랄까.
그해에는 그 과에서 가고 싶어 하는 해외 학회가, 저 멀리 남미 땅 아르헨티나였던가.. 아무튼 지구 반대편에서 열렸다. 원래 해외 학회는 제약회사가 협회에 X명을 후원하겠다고만, 후원 의사를 밝히고, 그 X명은 국내 학회에서 적절하게 배분이 이뤄진다.
그 과장은 본인이 곧 죽어도 학회에 가야겠고 (이과수 폭포를 보러 가셔야겠단다.) 국내 학회에서 후원 명수가 모자라 본인이 가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한 명 후원을 더 늘리라고...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일 년에 학회 보내는 후원 금액만큼 약을 쓰지도 않는 사람이 너무나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학회 후원 결정은 나 같은 일개 사원이 결정하는 것은 아니기에 소장님께 SOS를 쳤다.
여차저차하여, 해당 건은 마무리되었고 나는 내심
'이렇게까지 했는데 DC는 인간적으로 넣어주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그전까지는
'혹시, 안 넣어주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했지만, give and take라고, 이건 갑과 을의 관계를 떠나서 진짜,
'인간적으로'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DC 서류도 내가 다 쓰고 준비해 오는 것이고 본인은 그냥 준비된 서류를 직접 가져다가 약제과에 제출만 하면 되는 것인데, 설마 그걸 안 할까 싶었다.
보기 좋게 나는 뒤통수를 맞았다. DC 접수일 나는 한 번 더 확인하고자 과장의 외래가 있는 날 병원으로 갔다. 가서 그냥 제출하셨는지를 간단히 확인할 요량이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하고 외래 진료표를 보는데 싸늘하다. 과장이 휴진이라는 것이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휴가를 낸 것 같다. DC를 접수하지 않을 요량이었고, 받아먹을 건 다 받아먹고 이런 게 먹튀라는 건가? '인간적으로 해주겠지'라는 나의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나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그 사람이 DC 서류를 들고 직접 접수하는 장면을 확인했어야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자책을 했다.
불현듯 OO 호텔에서 아주 비싸서 맛이 없을 수 없는 중식을 먹던 어느 날이 생각났다. 본인이 평소 친하게 지내던 마취과 과장을 데리고 와서, 본인 돈도 아닌데 생색을 냈다. 생각해 보니 마취과 과장이 약제과 과장과 아주 친하다고 자랑처럼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무턱대고 마취과 과장 연구실 문을 두드린다. 왜 왔냐며 혼쭐이 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절박하고 뭐라도 해봐야 하니까 안면몰수하고 연신 문을 두드린다.
문이 열리고 나는 헐레벌떡 인사와 함께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드라마 속 캔디 같은 여주인공처럼, 주변에서 일어나는 힘든 일을 우연한 기회로, 절실함으로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는 이야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취과 과장도, 약제과 과장과 친하지만 딱히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설령 약제과 과장에게 이야기해 본다 해도, 어쨌거나 병원의 방침은, 신약을 올리려는 과의 과장이 '직접' 서류를 접수해야 한다.
내가 뭐라고 병원의 방침을 어기면서까지 나의 편의를 봐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 병원 DC를 어이없이 놓쳤다. 다음 DC는 3개월 뒤였다.
두 가지 마음이 들었다.
1) 회사에 뭐라고 말하지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내가 무턱대고 찾아간 마취과 과장이 그 당시 영업부 전체 이사님과 절친한 사이였다는 것이었다. 내가 사색이 되어 뭐라도 해보겠다고 본인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는 것을 내가 소장님께 보고하기 전에 아셨고, 솔직히 먹튀 한 과장의 쓰레기 같은 인성은 익히 회사 모두가 알고 있는지라, 생각보다 나는 크게 혼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세웠던 목표 달성에 3개월이라는 차질이 생기긴 했다.
2) 인간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감
그때부터였을까, 가뜩이나 많지 않았던 인간에 대한 믿음은 영업부에 있으면서 더더욱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나는 성악설을 믿는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악한 존재이지만,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조금 더 그럴만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기질이나, 자라온 환경, 혹은 본인의 삶에 따라 본래의 악함이 더 두드러지기도, 혹은 옅어지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이제 어떤 마음으로 갑질을 해 대는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쉽게도 2년 차 때까지는 뚜렷이 얻지 못했다.
어렴풋한 방향성을 얻게 된 것은 3년 차 때였던 것 같다.
자세한 이야기는 3년 차 드디어 마케터로 일하면서 겪었던 사건들을 얘기하며 풀어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