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말이지 난 살아야겠어
내가 남편의 외도를 알고 상간소를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집을 나와 친정으로 돌아온 상태였는데 변호사님이 신혼집을 비우는 게 상간소에서 불리할 거라고(결혼생활을 이어갈 의지가 없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하셔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서 하루 이틀을 자고 왔다. 근데 전남편새끼는 뭐가 무서운 건지 그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같은 부대 선배네 집에서 지낸다는데 아마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더 캐묻고 뒤쫓는 것도 지겨워진 나는 그 신혼집에 갈 때마다 내가 계속 여기서 지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배달도 시키고 사진도 찍고 별짓을 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마주쳤다.
징계위원회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고 나는 멍청하게도 남편이 잠깐 미쳤나 보라고, 다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착각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나에게 벌어진 일이 도대체 뭔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도 조금도 알 수 없는 딱 그 상태로 껍데기로만 존재했던 그 시기.
지금 생각해 보면 용서(?)하기로 할까 하는 마음은 남편을 사랑해서였다기보다는 내 선택이 실패였음을 인정하고 주위에 알리기 싫었던 거지 같은 자존심이었던 거 같다. 그냥 나만 참으면 남들 보기에는 괜찮은 부부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tmi 또 시작
실제로 내가 남편과 이혼을 한 후에 정말 극소수의 지인들만 알고 있는 상황일 때, 아주 가끔씩 생각해 주는 척, 걱정해 주는 척 한사람의 심장에 핑킹가위를 찔러 넣고 가위질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 네가 참고 살지.”
“시부모한테 좀만 더 신경 쓰고 잘하지. 너 맏며느리였잖아.”
“그러게 네가 너무 남편보다 잘나서 그래. 요즘 남자들 아닌 거 같아도 그런 거 못 견뎌. “
이 지긋지긋한 꼰대력 만렙인 말들.. 난 다른 것들은 그냥 한번 듣고 가래침으로 카악 퉤! 하고 뱉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저 마지막 말이 지금까지도 너무너무 억울하다. 내가 무슨 남편보다 경제적으로 몇 배라도 번다면 저 말을 들어도 상관없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나도 그때는 월급쟁이였다고!!!
여기서 나는 아주 큰 삶의 교훈과 지혜를 얻었다. 내가 실제로 돈을 얼마를 버는지에 따라 사람들이 날 봐주고 대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직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나를 내 직업에서 꽤나 괜찮고 돈을 잘 버는 사람으로 대우해 준다는 것을. 지난 연재글에서 말씀드렸듯, 마음이 기어다녀도 워킹은 런웨이처럼 걷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내가 남편보다 돈을 더 잘 버는 줄 알았다. 거짓인 명제다.
오늘도 역대급으로 긴 tmi.
난 나에게 저런 핑킹가위를 쑤셔 넣은 어른들.. 장례식에 꼭꼭 갈 거다. 마음속으로 훌라춤을 추면서.
아무튼 근데 남편은 생각이 달랐다. 이혼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한다. 끝까지 내 책임이란다. 자기가 외도를 하게 된 건. 글을 쓰다 보니 진짜 개새끼가 따로 없다.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자기가 피해자며, 그렇기에 나에게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헛웃으며 내가 물었다.
나 : 그럼 나한테 들키기 전에 나를 죽여버리지 그랬어
남편 : …….
나 : 너 정도 힘이면 백번도 나를 죽일 수 있었을 텐데?
남편 : 내가 널 어떻게 죽여
나 : 근데 내가 가해자라며 ㅋㅋ 네가 피해자라며!!
남편 : (한참을 뜸 들이다가) 사실..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네가 어떤 방법으로든 어떻게든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어.
나 : 뭐?
남편 : 뭐 교통사고나 질병으로나.. 이기적인 건 아는데 그렇게 해야 헤어질 수 있으니까. 너 위 아프다고 했을 때, 큰 병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아니면 네가 다른 남자를 만나면 좋겠다는? 뭐 그런 생각.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리고 내가 외도를 하길 바랐다고? 연애시절 그렇게 나 없이는 못 산다고, 내가 아파서 병원에 가면 나를 진료하는 의사를 질투하던 사람인데? 그리고 지금 그걸 저렇게 아무 표정도 없이 나한테 남 이야기 하듯이 말한다고?
일단 웃음이 나고 말문이 막히고 종국에는 마음의 피가 울컥하고 쏟아져 나올 거 같았다. 핏덩어리가 눈구멍 콧구멍 귓구멍으로…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믿는 사람 중 하나인, 누가 등 떠밀어 시킨 결혼도 아니고 내가 선택한 남자의 입에서,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한다고 나 없으면 자기는 못 산다고 버릇처럼 말하던 사람의 그 입에서 이젠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말을 들을 때의 심정을 아마 평생 모르시길 바란다.
남편의 외도를 알고 나는 남편한테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다시 상처를 꿰매 보려는 마음이 양립했다. 1 안인 복수를 하게 된다면, 전직 군인이지만 세상 개쫄보인 남편에게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충격을 남겨주고 싶었다. 내가 너무너무 잔인하고 끔찍하게 죽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말이다. 지금이야 말하는 나도 듣는 여러분도 미친 생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때의 나는 죽는 것 외에는 희망이 없었다. 더 자세한 계획을 말하진 않겠다.
남편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던 내가 갑자기 가방을 뒤졌다. 마침 그날 오전에 정신과 진료를 받았기에 나한테는 딱 한 달 치. 법적으로 정해진 30일 치의 수면제가 있었다. 그걸 한통에 담아놨었는데 손에 쥐고 뚜껑을 열었다. 남편이 그게 뭐냐길래 수면제라고 했고 그 말을 하는 즉시 나는 앞에 있던 커피와 함께 수면제 30알을 입에 털어놓고 삼켰다. 남편은 너무 놀랐는지 119에 신고를 하겠다고 했다. 내가 바로 남편의 핸드폰을 빼앗고 등뒤로 숨기며 말했다. 신고하면 너도 죽여버릴 테니, 너는 너의 한순간의 더러운 쾌락 때문에 네가 한때나마 사랑했던 한 사람의 목숨이 서서히 고통스럽게 끊어지는 걸 두 눈으로 보라고 했다.
나도 내 인생이 거기에서 끝나는 줄 알았고, 마지막으로 보는 광경이 거실 테이블일 거라고 생각했다. 몸이 점점 수그러지고 머리가 멍하다. 유영하는 느낌.
내가 생각한 남편의 다음 행동은 무력으로라도 나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아 얼른 신고를 하는 것이었다. 그 덩치의 남성이 나 같은 여자에게 힘을 사용해서 핸드폰을 뺏는 건 식은 죽 먹기다. 그런데.. 남편이 가만히 있는다.
약을 삼킨 지 얼마나 됐을까. 갑자기 위경련이 오는 것처럼 위가 조이고 허리를 구부려야만 하는 통증이 몰려왔다. 아 이렇게 죽는 거구나 하면서 몸을 둥글게 말며 바닥에 누워서 남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데 나를 보고만 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죽길 바란 게 진심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구나. 그때 남편의 썩은 눈깔과 마주치는 순간 난 결심했다. 살아야겠다. 무조건 살아서 저 새끼한테 살아있는 게 지옥이라는 말이 뭔지 내가 반드시 보여줘야겠다.
시간이 흐르고 기억이 드문드문 나지만 나는 끝끝내 잠들지도 않았다고 한다. 지독한 나란 여자. 내 생각보다 상당히 강인했다 나는. 아마 주님이 도우신 걸로 생각한다. 내가 정신줄을 놓을락 말락 하니 그제야 자살방조죄(?)로 잡힐까 봐 겁이 났는지 남편은 하필이면 아오 하필이면 성보라에게 연락했고 약 한 시간 뒤에 사색이 된 성보라가 그 새벽에 날 데리러 왔다. 난 정말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잠도 들지 않고 계속 떠들어대는 나를 본 성보라는 약 먹은 지 두 시간이 다 되어가는 동생이 살아있는 걸 보고 큰 고비는 넘겼다고 생각했단다.
조수석에 거의 실려서 탄 내가 비몽사몽으로 그 와중에 길이 잘 뚫렸다며 운전을 하겠다고 씨부렸던 기억이 살며시 나고 그 말을 세 번째 했을 때 침묵 속에 전방만 주시하던 성보라가 “닥쳐!!!! 내 손으로 죽여버리기 전에!! 아주 별 지랄을 다 떨고 있네!!! 진짜 안 닥치면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 잠이나 쳐 자!!”라는 교양 넘치는 샤우팅을 했고 수면제 30알보다 더 무서운 성보라의 사자후에 난 그 이후로 모든 기억을 하며 조용히 실려왔다. 그리고 집에 와서 아주 잘 자고 건강히 일어났다고 한다. 성보라의 샤우팅은 죽은 자를 일으킨다.
다음날 성보라는 말했다. 그거 수면제 아니고 소화제 같은 거라고. 플라세보 효과를 노리고 주신 걸 거라며.. 어찌나 잠을 안 자고 떠들어대는지 진심으로 죽여버리고 싶었다고.
나중에 이 이야기를 정신과 선생님께 말씀드리자 일단 혼부터 내셨다. 그러라고 수면제를 처방해 준 것이 아니고 다행히 용량은 적었지만 그래도 큰일 날 뻔했다고. 다시는 처방해주지 않을 거라고 하셔서 파리처럼 빌었다. 그래서 결국 몇 달간 2주 분량만 받아오는 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더니 선생님은 그 남편은 더 안 만나는 게 좋을 거 같다고. 직접 대면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남편은 경도의 사이코패스인 거 같다고 하셨다. 소름이 돋았다. 내가 정말 살해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리고 다시 한번 결심했다.
이제부터 진짜 죽고 싶은 건 너일 거야. 난 이제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