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거 Feb 18. 2019

꿈의 역사 #5

최초의 감정

Photo by Anna Popović on Unsplash


이내 공기가 가라앉는다. 목소리에 올라탄 식어버린 감정이 수화길 통해 귀로 쏟아진다. 어느새 목구멍이 말라서 붙어있었던 것인지 침은 뱃속까지 넘어가지 못한다. 아주 잠깐, 살짝 찢어지는 지는듯한 기분이 목구멍을 훑는다. 아마 지금 뿐 아니라 수차례 이런 경험을 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고통은 익숙하지도, 물론 달갑지도 않다. 


어쩌면 그가 최초로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세상으로 나왔을 때 분명히 있는 힘껏 울었을 것이다. 내가 세상에 나왔노라, 어머니의 보호와 컴컴한 세상을 벗어나 생명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왔노라고 사방팔방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 우렁찬 고함이 환희에 의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을 마주한 것에 대한 첫 번째 감정에 대한 분명하고 유일한 표현. 그것은 두려움이었으리라. 이제는 스스로 메마른 공기를 마셔야 하며, 어미의 젖을 빨아야 한다.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할 것이며 안락함에서 박탈당하고 때로는 세상의 냉담한 눈초리를 마주할 것이다. 세상을 향해 망설임 없이 내지르던 고함 또한 사실은 스스로 숨을 내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자 몸무림이지, 결코 본인의 등장을 만천하에 명명백백히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것이 두려운 것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이제부터 얼마간 세상은 따스히 바라봐 줄지언정 결코 영원한 것은 아니며 몇 해가 지나 또래들과 어울리기 시작할 무렵엔 본격적으로 무리 속에서 삶에 대한 투쟁과 쟁취가 어떠할 것인지를 그저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일 뿐이었을 것이다. 이제야 그러한 감정이 두려움이었을 것이라 말하는 것은, 이제야 두려움이 아닌 다른 감정을 누려본 까닭이다.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은 여러 감정 속에서 두려움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슬하를 벗어나 혼자의 삶을 혹은 다른 이의 기대까지 하나씩 짊어지며 두려움보다는 흔히 긍정적이라 여겨지는 감정이 더 빈번히 솟아났을지 모르나, 그마저도 이제는 위태로울 뿐이다. 


돌이켜보면 그에게 두려움은 부정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두려움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기인한다. 실패, 박탈, 패배, 절망, 상실 등 그 가슴속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는 너무나 두려웠다. 모든 종류의 실패가, 박탈이, 패배가, 절망이, 상실이 너무나 두려워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는 것을 경험했다. 때로 그 두려움은 너무나 거대했다. 육중한 꿈의 무게에 짓눌려 이불을 박찰 수 없을 만큼 좌절했다. 아무리 눈물을 삼켜도 먹먹함은 사라지지 않았던 어떤 두려움은 그를 겁쟁이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온전히 부정적이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그를 겉으로 보기에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그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성공, 소속, 희망, 승리, 소유 등 모든 이가 바라는 것들과 늘 가까워졌다. 하지만 이제 그는 딜레마에 빠진 것 같다. 


두려움이 온전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모든 긍정적인 것들이 그를 행복으로 이끌지는 못 한다. 그는 사랑하는 이들의 두려움이 두 사람을 떨어뜨리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그녀는 그의 행복이 두렵다. 그가 완전한 행복에 가까워질수록 그에게 그녀의 소용이 줄어들어가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사실이 너무나 슬프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하다. 그녀가 그로부터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를 더 간절히 바라게 만들기에 그는 그녀를 더 가까이하고 싶을수록 그녀를 불안하게, 더 불행으로 몰아가야 한다. 그녀와 그가 만들어온 관계의 실패, 그로부터의 박탈, 그의 부재에 대한 절망, 그의 상실 등 그녀가 느낄 수 있는 온갖 침침하고 흐릿한 감정들이 그가 그녀를 붙잡아둘 수 있는 수단이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가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껴야만 한다. 만약 그녀가 온전히 그의 사랑을 알게 된다면, 그 거대한 것을 알아버린다면 그녀는 더 이상 그를 갈구하지 않을 것 같다. 만족과 행복감 뒤에 곧장 따라오는 권태 또한 그가 경계하는 것이다. 권태는 그녀를 충분히 떠나보낼 수 있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다.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과연 가능한지 알 수 없으나, 인정하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무엇이 나를 두려움으로 인도하고  어떻게 하면 두려운 일을 모면할 수 있을지 방법을 모색하게 하는 것은 꽤나 생산적일 것이다. 


두려움을 인정하기로 한 그녀의 미래가 꽤나 궁금하다. 두려움을 극복한 인류의 역사가 꽤나 흥미진진한 탓이다. 

작가의 이전글 꿈의 역사 #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