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톡. 톡. 톡....
가운데 손가락을 슬며시 들어 노트북의 한 귀퉁이를 일정한 박자로 두드리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다. 일부러 일정한 박자를 맞추어 톡톡 두드리는 것은 아닐 테다. 나보다도 반 마디쯤은 짧은 손가락으로 골똘히 박자를 타는 모습을 보노라면, 지금 저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고민이 꽤나 빠른 장단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이내 짐작할 수 있다. 왼손은 박자를 맞추며, 오른손은 아래입술을 이리저리 조물 거 린다. 이리저리 늘려 잡아당기고 꼬집기도 하며 삐죽 내밀어 문지르기도 한다. 생각에 사로잡힌 탓에 왼손과 오른손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겠지. 곳곳에서 생각의 외침은 머릿속을 바쁘게 헤집어 놓을 테고 잠시 내가 본인을 바라보며 이런 하릴없는 생각을 하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잠깐의 눈길조차 안 주는 모습에 일말의 서운함도 없다면 거짓이지만 분명해야 할 일을 서둘러 마치고 와락 나를 끌어안고 싶어 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해 버린다.
뭐든 빠른 것이 미덕인 세상에서 기다리는 것은 다소 어리석은 행동일 수도 있다. 운전 중 마주한 우회전 시 보행자의 초록색 신호가 끝나기를 기어이 기다리다 자칫 경적소리를 듣는 것처럼. 누가 뭐라든 어떤 비난을 퍼붓든 너를 기다리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것이지만 뒤 차가 경적을 울리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처럼 조바심을 치게 된다. 조바심을 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을 고요히 하지 못 하는 것이 나이므로 티 안 나게 숨을 크게 내쉬며 너를 다시 바라본다.
문득 내 생각이 들어 나를 바라볼 때 내 눈빛이 제법 다정하다면 하다못해 실소라도 흘릴까 하여 최대한 다정하게 눈을 떠본다. 하얀 손가락이 빨간 입술을 희롱한다. 입술만큼이나 손가락도 가녀리지만 투닥거리는 고양이 새끼들만큼이나 인정사정없다. 마치 깊이가 있는 듯이 화면 안 먼 곳을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과 아래쪽이 미묘하게 더 짙은 갈색의 눈동자, 매끄러운 눈매, 촉촉한 깜빡임. 이렇게 자세히 너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은밀한 즐거움이다. 평소에 이렇게 빤히 바라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인류가 칭송하는 미술 작품은 시간이 허락되는 만큼 쳐다보더라도 누구 하나 말리거나 제지하지 않는데, 이만큼 너를 칭송하는 유일한 사람조차도 이런 진지한 감상 시간은 귀하다. 손길은 닿지 않으나 눈길은 한껏 닿을만한 거리에 기꺼이 너 자신을 둔 것은 오히려 포상인 것을 알아차렸다.
귓불에서 시작해 떨어지는 미끄러운 곡선을 따라 솜털은 가지런히 열을 맞추고 있으며 향긋한 냄새가 피어오를 것이다. 크게 끌어안아 가슴에 가둬두고 뒷목에 코를 박아 크게 들이마시면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코를 타고 온몸을 내달리겠지. 그렇게 숨을 들이마실 때면 사뭇 단단한 주먹으로 내 가슴을 퍽퍽 내리치겠지만, 가슴팍에 꽂히는 매콤한 주먹맛도 나는 별미로 여긴다는 것을 아직 말한 적 없다. 너로 인해 자극되는 모든 감각이 내게는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애정의 신호로 변환된다는 사실을 너는 결코 모르겠지.
노트북을 두드리는 손가락 박자가 멈추고 다정한 눈빛이 양 쪽에서 달려와 부딪치면, 어김없이 나는 네게 너를 바라볼 수 있어 얼마나 즐거웠는지 조잘대버릴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