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좋아
13년 차 직장인, 치열하게 달려온 시간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앗아가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기억력'이었다. 한때는 스치듯 들은 이야기도 놓치지 않던 날카로운 기억력이었는데, 이제는 어제 한 일도 가물가물할 때가 많다. 그런데 이 '나빠진 기억력' 덕분에 나는 뜻밖의 해방감을 맛보고 있다.
스타트업 시절, 나는 퇴근 후에도 뇌가 멈추지 않는 병에 걸려 있었다. 오늘 논의했던 과제, 내일 해야 할 일, 혹시 빠뜨린 것은 없는지, 시스템은 안정하게 운영되는지... 침대에 누워서도 머릿속은 온통 회사 업무와 관련된 생각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다시 식탁에 노트북을 켜고 확인하고 다시 눕기를 반복한다. 불안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잠식했다. 휴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쉬면서도 쉬는 것 같지 않은 찝찝함. 그 모든 것이 '선명한 기억'이 주는 저주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저녁 식사을 먹다가 문득 '오늘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생각하면, 신기하게도 세부적인 내용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어제 밤까지 골머리를 앓던 문제도 아침이 되면 '아, 그런 게 있었지' 정도로 희미해져 있다. 처음에는 '나이가 들었나' 싶어 걱정했지만, 이내 깨달았다. 이 망각은 나에게 불안의 연쇄 고리를 끊어내는 선물이라는 것을.
나의 기억력 감퇴는 더욱 빛을 발한다. 회사를 나서는 순간, 업무와 관련된 생각들이 마치 안개처럼 흩어진다. 출근 후 다시 컴퓨터를 켰을 때야 비로소 '아, 맞다! 어제 이거 마무리해야 했지' 하는 식이다. 이 덕분에 퇴근 후의 나는 온전히 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과 보드게임을 하고, 아내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시간. 예전 같았으면 머릿속 한편에서 '버그는 없을까?', '시스템 확인해봐야 하나?' 하는 잔상들이 어른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잔상들이 희미해지고, 지금 이 순간의 행복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행복이라 표현하지만 두 아이와 노는 것이 기억을 잊게해 준 요인 아닐까). 굳이 애써 업무를 잊으려 노력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이다.
물론, 기억력 감퇴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업무의 효율성 측면에서는 단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현상 또한 '성장통의 유통기한'이라는 큰 틀에서 바라보고 있다. 과거의 아픔이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듯,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불안감도 망각이라는 필터를 거쳐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과정이 아닐까.
이직을 하며 겪었던 사람과의 갈등, 시스템 적응의 어려움, 아파도 버텨야 했던 육체적인 고통... 이 모든 것이 '잊혀짐'이라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나를 괴롭히던 유효기간을 끝내고 있다.
나빠진 기억력은 나에게 뜻밖의 '현재'를 선물했다.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불안에 갇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 어쩌면 이것이 13년 차 직장인이 얻은 가장 값진 성장통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퇴근 후, 업무 생각이 줄어든 머리로 아이들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이 평온함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유통기한 없는 행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