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op Beving의 'for Mark'를 듣는다. 입원해 있는 남편을 생각한다. 7시30분 혼자 아침을 먹으며 그가 들을 수 있는 음악을 골라 보낸다. Mark를 위한 곡이 그의 마음에도 살포시 내려앉기를 바란다. 이어 이루마의 River flows in you. 남편과 나는 지금 예기치 않은 상황에 조금은 마음이 움찔해져 있다. 애써 표현하지 않아도 뭔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는 부드러운 것을 갈망한다.
불편한 상황을 맞닥드리지 않기 위해 완벽하게 준비한다고 해도 정면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그 여파로 일상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망막박리수술 퇴원후 남편이 사용할 물품을 구매했다. 환자용 구멍뚫린 베게의 사용설명서를 꼼꼼하게 읽었다. 생경함과 먹먹함 때문이었을까? 귀로 들어오는 곡의 멜로디 중간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당황스러웠다. 곡의 선율에서 튀어나온 하나의 음이 오히려 내 틈새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래서 호흡을 고르고 그 선율에 몸을 맡긴다.
멜로디는 포근히 가슴에 얹혀진다. 크게 슬퍼할 일이 아닌데도 난 음악을 빌미삼아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친다. 곡을 따라 기분은 조금씩 바닥을 차고 수면 가까이 떠오른다. 때때로 이런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잡아도 운명처럼 비켜가는 것, 피하고 싶지만 거대함처럼 다가와 나를 흔들어버리고 마는 것. 그러면서 또 하나의 한계를 받아들인다.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고통이 얼마의 간격을 두고 서있는지 알수 없다. 미리 두려움을 가질 필요도 없다. 단지 내가 그것들을 제대로 경험하기를 바란다. 당황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내 옆에 두고 조용히 지나가는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기를 바란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소멸해가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매복하여 나타나는 하나의 작은 슬픔을 맞이하고 나면 한줄의 기록이 남는다. 매일 아침 상대의 몸의 작은 징후들을 포착해내고 그 미세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보면 하루안에서 그 무거움은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트렉안의 몇 곡의 음악을 연이어 듣고 나면 방금전에 찾아왔던 그 감정의 떨림도 드라이해진다. 그래서 처음 나를 강타했던 그 음조차 잊어버리고 만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이제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나이가 들면서 감성은 더욱 더 예민해지는 것 같다. 물론 이런 것들을 모두 품으며 느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느 날 나를 건드리는 음 하나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도 상관없이 기쁠 것이다. 상처 하나에 다시 마음이 열리고 그 경험은 새로 태어난다. 결과와 상관없이 그 상황에 온전히 정성을 쏟아부을 뿐이다. 그래서 그 힘은 더 세밀해지고 부드러워진다.
올해 만나게 될 작은 고통들에게도 인사를 나누고 싶다. 끊임없이 만나게 될 이질적인 것들에 화들짝 놀라지 않고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그때마다 나를 선택한 음악은 여지없이 뛰쳐 나와 다시 한번 나를 울릴른지 모른다. 그 순간 음을 잡고 고요함안에 오래 머무를 것이다. 그러면 몸은 피아노의 선율보다 점점 더 부드러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