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헌 May 12. 2024

여행의 시작

사랑의 기술

여행의 시작


아비뇽에 사는 친구 장 이브가 보낸 작은 소포를 열었다. 보라색 라벤더와 노란 해바라기가 들판을 가득 메우고 뒤로 몇 채의 농가와 낮게 드리운 언덕뒤로 붉은 노을이 펼쳐져 있는 프랑스 납부 프로방스의 사진첩이었다. 끝이 없는 라벤더의 진한 보라와 해바라기의 노랑이 금방이라도 사진에서 튀어나와 그 진한 물감을 내 옷자락에 토해낼 것 같았다.  온라인에서 언어 교환으로 알게 된 장은 작년 11월 고등학생 딸 그리고 아내와 처음 서울을  방문했다. 청계천에서 시작해서 광장시장, 동대문, 명동을 누비며 그들의 한국에 대한 인상이 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도록 같이 오래 걷고, 보고, 먹고 마시며 대화를 나눴었다. 아마도 그때의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진첩을 열자마자 오렌지색과 복숭아색이 조화롭게 섞여있는 주택의 지붕 타일, 고성의 육중한 기둥, 14세기에 만들어진 아비뇽 교황청 등 오래된 역사를 보여주는 건축물과 풍경들이 도시의 여유와 평화로움을 안겨주었다. 사진아래  소개된 지명을 구글 맵의 가고 싶은 여행지 목록에 추가해두었다. 퇴직후 계획중 여행이 빠질 수 없었다. 물론 몸의 컨디션을 생각해서 오십대나 육십대 초반은 가급적 비행시간이 많이 걸리는 남미, 아프리카 등 먼 대륙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로방스의 보라와 노랑이 다시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여행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떠남이지만 잠시나마 내가 있었던 자리를 확인시켜준다. 작년 12월 한달 동안 호치민에 있는 남편을 방문했을 때 가볍고 밝은 그의 에너지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삼년 넘게 엄마와 함께 살면서 돌봄이 필요한 노인과 함께 사는 일이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거기 가서야 문득 알게된 까닭이었다. 상대가 주는 에너지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엄마는 몸이 불편하시니 동반되는 부정적 감정을 수시로 알아채주고 달래주고 위로해주고 스킨십으로 애정을 표현해주어야 했다. 그래서 내가 느끼지 못한 사이에 때로는 엄마의 우울함이 내 생각으로 연결되어 낮게 드리워졌을른지 모른다. 


드디어 남편이 6년의 해외근무를 마치고 이번주 서울로 온다. 내가 독일 근무로 떨어져 지낸 2년까지 합하면 결혼 후 6년정도 헤어져 지냈다. 서울의 추운 공기에 놀라지 않도록 비니 모자와 머플러, 핸드크림을 포장해두었다. 여기에 보라색 튤립과 유칼립투스 꽃다발을 안고 공항에 나가려고 한다. 재회의 세리모니랄것도 없지만 지금부터 우리의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을 채울 새로운 낯섦을 미리 만난다. 시작되는 여행에서 지금의 낯섦이 주는 호기심과 기분좋은 긴장이 오래 유지되기를 바란다. 서로를 알기위해 노력했던 신혼 초와 달리 지금은 함께 보낸 시간들로 서로를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상대를 수용해주는 것이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모양으로 여겨져 싫은 감정조차 표현하지 않았던 그때의 내 마음이 걸린다. 하지만 그것 또한 내가 정의한 사랑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한다.


그래서 다가오는 시간안에서는 우리의 사랑의 기술이 조금 더 편안해지고 풍요로워져 '사랑의 기쁨'으로 넘쳐나기를 바란다. 서로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의 힘과 기술을 싹틔우고 가꾸어 선물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쉽게 읽을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방식을 세심하게 알려주는 사랑의 기쁨 메뉴얼을 보내려고 한다.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랑은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이다. 내 감정을 표현할 때 어떤 언어와 눈빛과 제스추어., 표정으로 흘러나오는지 내가 먼저 느낀 다음 솔직하고 명료하지만 부드럽게 가 닿아야 한다. 조용한 목소리, 서두르지 않는 침착함, 여유있는 몸가짐으로 마치 기분좋은 백허그처럼 감싸안아야 한다.


둘째 사랑은 답을 빼고 묻는 것이다. 상대의 의견을 의도를 가지고 묻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서로에 대해 알고 싶었던 그 떨림처럼 빛나면서도 수줍음이 담긴 호기심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작은 질문들로 상대의 마음의 문앞에 서는 것이다. 질문과 대답이 오가면서 내가 알고 있다고 단정했던 것들을 다른 위치로 데려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배려이다. 사유하는 방식이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셋째 사랑은 조용한 목소리로 기다려주는 것이다. 마음으로 내 말의 속내를 받아 들일 때까지 내가 던진 말들의 행방을 경로를 따라가 관찰하고 상대의 마음안에 어떤 모양새로 자리를 잡고 싹을 틔우고 있는지 자라고 있는지 알아채주고 지켜보는 것이다.


넷째 사랑은 성장하는 것이다. 더 좋은 방식을 찾는 것이다. 마치 글을 쓰는 것처럼 상대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고 키워가는 것이다. 한 해 두 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며 켜켜이 쌓은 시간만큼 사랑의 기쁨이 같이 커져나가는 것이다. 상대가 좋아하는 방식을 더 많이 해주고 그 느낌도 물어주는 것이다. 정성을 다하고 세심하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과 이별할 때 서로에게 보여준 사랑의 힘으로 아무 미련없이 눈을 감아도 되는 것이다.


진정한 여행의 시작앞에서 마음이 설렌다. 마치 남편의 손을 처음 잡은 그 순간의 떨림이 느껴진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그래서 다시 시작하기 좋은 때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기술은 계속 진화하고 우리는 서로의 얼굴이 좀 더 온화해지고 따뜻해지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도 관심의 테두리를 넓혀 나가는 것을 보게 될것이다. 사랑의 기쁨은 여러 범주의 반경을 확장시키고 계속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5월의 어느 봄날 아비뇽 골목의 노천 카페에 앉아 있을 것이다. 붉은 제라늄 화분이 빙둘어 얹어져 있는 분수에서 아래로 길게 휘어지며 흘러나오는 몇 가닥의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햇살의 기분좋은 열기가 느껴지는 파라솔 아래 서로의 눈에 담긴 존재의 기쁨을 확인하고 파란 하늘을 향해 지긋이 눈을 감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민달팽이의 시간을 보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