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양이의 죽음에 대하여 43] Ⅱ. 책임에 대하여 ⑧
비와 비 사이의 축축하고 무거운 여름, 꼭 1년 전과 같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대수롭지 않은 이맘때의 온도와 습도, 냄새 따위를 기억하는 것은 앓다 떠난 내 사랑, 하나뿐인 고양이 미미 때문이다. 살면서 가장 큰 절망과 회한의 시간들이 쉽게 잊힐 리 없다. 날씨란 절기를 따라 제 몫의 일을 할 뿐이겠으나 사랑을 잃은 내겐 무엇이든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눈부신 5월부터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니었다. 미미가 많이 아프기 시작한 것이 지난해 5월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5월의 싱그러움, 생의 감각으로 가득한 이 계절은 어둡고 긴 터널의 입구가 되어 버렸다. 눈을 질끈 감고 여러 번 숨을 고른 뒤에야 겨우 들어선 기나긴 터널.
갑자기 너무나 나빠진 수치가 믿을 수 없어 아이를 안고 동동거리며 뛰어다녔던 작년 5월, 아이가 그리 아플지 모르고 대단치 않은 일들에 얽매여 미친 사람처럼 분주했던 날들. 6월, 끝없이 수직 하락하는 놀이기구를 탄 듯 곤두박질했지만 아이가 좋아질 것이란 희망을 버리지 못했던 날들, 병원 문턱이 닳도록 아이를 끌고 다니며 괴롭혔다. 생의 가장 큰 절망 속에서 아이가 별이 되는 것을 지켜본 7월, 이승의 강을 건너려는 아이를 멈춰 세우려 안간힘을 썼지만 나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한 해가 지나, 그 잔인한 절망의 시간을 다시 떠올리며 미미에게 더 주지 못한 사랑과 정성, 살뜰한 보살핌이 한이 되어 시도 때도 없이 목구멍이 뜨거워지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나는 울었다. 아 내가 왜 그랬을까 바보 멍청이 같이. 아이를 편안하게 해주었어야 하는데, 사랑하고 아끼는 시간을 더 많이 보냈어야 하는데. 가슴을 치고 발을 굴렀다. 마구 화가 나서 엉뚱한 상황, 죄 없는 이에게 참지 못하고 화를 퍼붓기도 했다.
내가 어쩌다 너를 잃었을까. 나이가 적지 않고, 만성질환이 있다 한들, 아니 그러므로 더더욱 내 착한 아기를 잘 돌보았어야 하는데, 네가 그리 떠난 것이 다 내 탓인 것만 같다. 좋아도 나빠도 야속한 날씨. 장마가 시작되고 7월에 접어들며 안절부절, 오지 않는 아이를 기다리며 날마다 베개를 적셨다. 사랑이 없으니 삶의 고단함이 아무 의미가 없구나. 허공을 끌어안고 잠들곤 했다.
그즈음 출근길에 한 고양이를 만났다. 4,5개월쯤 되었을까. 어이, 집사 양반, 내 손을 잡아주오, 당당히 요구하는 아이였다. 지각에 쫓겨 매정하게 발걸음을 옮겼지만 실로 감정의 폭풍에 휩싸였다. 어떤 예고도 없이 불쑥 웬 고양이란 말인가. 그러나 결심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좋다, 내 퇴근길에 너를 줍겠노라. 그러나 유독 퇴근이 늦은 날이었고, 아이는 없었다. 다른 집사의 손을 잡고 떠났다고 하니 다행이나 서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번 터진 둑은 무너져 내렸다. 고양이를 들이겠다 생각한 순간 잊고 있던 행복의 감각이 모처럼 살아났던 것이다. 고양이 가족을 만들겠다는 열망에 휩싸이고 만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멀고 낯선 곳에 가서 미미와 같은 품종의 고양이 일가족(?)을 만나고 왔다. 미미처럼 파양 당할 신세의 수고양이를 보러 간 것인데 번식묘로 살아온 엄마 고양이와 부실하게 태어난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 모녀가 신경이 쓰였다. 엄마의 얼굴은 행복한 고양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저 작은 몸뚱이로 3년여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을 아이의 얼굴이 고단하고 지쳐 보였다. 반면 몇 번째 아기인지도 모르는 그녀의 딸은 물정 모르고 귀여웠다.
어떤 집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너희들의 삶이란 참으로 다르겠지. 저 귀여운 아가도 몇 년 새 너처럼 고단한 얼굴을 하고, 어쩌면 ‘새끼 빼는’ 기계로 살 수도 있겠구나. 너희 모두 좋은 집사 만나 사랑받으며 반질반질한 집고양이로 살기를. 나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건 정말 아니다, 이런 식으로 동물을 사고파는 것은 옳지 않다. 정말 지긋지긋한 업자들, 무책임한 사람들, 벌을 받아야 하는 인간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 왜 나는 고양이를 낳을 수 없단 말인가, 엉뚱한 한탄도 하면서.
모녀 고양이를 보고 온 밤 서울시장의 실종 소식을 들었다. 뒷목이 당기는 뉴스였다. 짧지 않은 연이 있고, 공인이자 사인으로 신뢰 비슷한 감정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고 줄행랑치듯 달아날 것이란 상상은 할 수가 없었던.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이승의 시간들은 이토록 허무한 것인가. 행과 불행이 아무렇지 않게 교차하고, 손이 닿는 거리에 죽음이 안녕하는 삶.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나에게 삶이 아주 조금 남았다면, 무엇을 할까. 답이 있을 리 없는 물음 속에서 일주일을 헤매고 모녀를 데려왔다.
202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