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네버 다이> (Tomorrow Never Dies, 1997)
양자경은 <예스마담>을 통해 이전까지는 홍콩 영화계에서 볼 수 없었던 ‘여형사’ 캐릭터로 호명되며 80년대 ‘여성 첩보물’의 선두주자이자 상징이 되었다. <예스마담> 시리즈를 통해 획득한 ‘액션 전문 여배우’의 이미지는 섹슈얼한 팜므파탈이 아닌 본드를 조력할 수 있는 매력 있는 여성 첩보원으로 전이되어 ‘웨이 린’으로 ‘007 시리즈’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는 단지 양자경이 80년대 홍콩 영화계의 대표적인 ‘액션 여배우’이었기에 탄생한 것이라 보기 어렵다. 그녀는 전 세계 위성 연결을 축하하는 엘리엇 카버(조나단 프라이스 분)의 연설회장 자리에서 우연히 ‘발견’되기 때문이다.
카버의 연설회장에서 은행장으로 위장한 제임스 본드(피어스 브로스넌 분)은 엘리엇 카버에게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 카버는 본드에게 영국 함대가 공격을 받은 것에 대한 시장 반응을 묻는다. 그에 대한 대답을 하는 본드 뒤로 아웃포커스된 웨이 린이 보이고, 카버의 시선을 거처서야 그녀는 스크린 안으로 또렷한 이미지로 진입한다. 하지만 그녀는 엘리엇 카버의 기자회견 장으로 이미 들어와 있었다. 그럼에도 카버가 그녀를 우연히 발견함으로써 그녀는 비로소 심도와 목소리를 가진 등장인물로서 기능을 하게 된다.
영화 내내 웨이 린은 이러한 ‘발견’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화면 안으로 등장한다. 본드가 꼭대기 층에 있는 카버의 비밀 연구소에서 빨간 인코더를 빼낸 후 그곳을 빠져나오려 하는데, 이를 방해하는 무언가와 강하게 부딪힌다. 본드가 그것을 느낀 후 같은 시공간에 있었을 웨이 린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 온다. 본드가 그녀가 여기에 있음을 감각한 다음에서야 그녀는 연구소를 빠져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본드를 매개해야만 빠져나가는 모습을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된다. 이는 영국 군함이 침몰한 위치를 찾아 잠수하여 미사일의 행방을 조사하는 장면에서 다시 반복된다. 미사일이 있는 공간에 도달한 본드는 그 공간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그 사람을 공격한다. 이러한 공격은 정체불명의 존재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 곧 직업인으로서 생존본능이라 할 수 있다. 이내 침몰한 군함이 붕괴되면서 그곳에 갇힐 위험에 처하고, 둘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원초적인 생존 본능을 공유하고 나서야 힘을 합쳐 그곳을 탈출한다. 즉, 제임스 본드에게 웨이 린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낯선 물질 그 자체이다. 심지어 자신이 영국의 첩보원이기에 얻을 수 있었던 정보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본드는 그녀를 주변으로 내몰고 스스로 그녀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이 시선의 주체로서 권력을 가진 상태일 때만 스크린 안으로 그녀를 불러들인다. 그렇기에 본드에게 웨이 린은 언제든 육체적인 매력을 뽐내며 유혹할 수 있는 팜므파탈의 ‘본드걸’이 될 수 없다.
웨이 린이 본드걸이자 '본드걸'이 아닌 이유는 서양인인 제임스 본드가 동양인인 웨이 린에게 느끼는 ‘낯섦’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베트남에서 그녀에게 함께 일하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지만 자신은 혼자 일한다며 거절당한다. (이는 영화에서 ‘거절’로 묘사되었지만 본드의 입장에서 ‘거절’이지, 웨이 린의 입장에서는 그저 일하는 방식의 차이에 불과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 영화 또한 제임스 본드가 웨이 린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카버에게 매수된 청 장군의 부하들을 혼자 처리하다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웨이 린 뒤로 본드가 등장하여 그녀를 돕는다. ‘무엇을 위해 일하냐’는 웨이 린의 질문에 ‘전쟁을 막아야 한다’ 라고 본드가 답하고 나서야 웨이 린과 본드는 함께 움직인다. 이러한 협력은 섹스로 여성을 포섭했던 이전의 본드 방식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녀의 공간이 한순간에 무기 기지로 변하는 것을 보고 ‘고향 생각이 난다’며 MI6을 떠올리던 본드는 자신이 영국과 중국에 카버에 대한 정보를 보낼 것이며, 웨이 린에게는 무기를 준비하라 명령한다. 그러다 그는 잠시 멈칫하고 그녀와 역할을 바꾼다. 이때 중국어로 된 키보드를 마주한 본드는 영국의 MI6에서 제공한 ‘본드카’를 자유자재로 원격 조종하며 빌런들을 따돌렸던 자신만만한 그가 아니다. 베트남의 카버 건물에서 웨이 린과 수갑으로 함께 묶인 채로 탈출을 시도할 때 차를 타자는 웨이린의 제안을 무시한 채 오토바이를 택하고, 그 선택이 옳았음을 오토바이 액션 시퀀스로 증명하던 본드는 더더욱 아니다. 그는 그 ‘낯섦’ 앞에서 웨이 린에게 주도권을 넘길 수밖에 없다. 이 ‘낯섦’은 홍콩에서 액션 배우로 명성을 떨치던 양자경의 등장에서 느끼는 서양 영화계의 반응과 다름 아니다. 분명히 자신들이 ‘발견’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생김새와 액션 액팅, 그리고 액센트에서 오는 막연한 불안함과 그것에서 파생된 무기력함은 ‘웨이 린’을 스크린 변방으로 내몰고, ‘본드걸’의 에로틱함을 거세시킨다. 따라서 양자경은 클리셰를 통과하고 나서야 ‘007의 본드걸’으로서의 지위를 겨우 획득하게 된다. 오토바이 액션 시퀀스 이후 본드와 웨이 린은 근처 마을에서 야외 샤워장에서 함께 물줄기를 맞는다. 그 전에 뒤따라오는 카버 일당들의 행동을 관찰하기 위해 본드 앞으로 돌아 앉은 웨이 린을 부담스러워하던 본드는 그녀가 샤워장에서 흠뻑 젖고 나서야 유혹의 제스처를 건네고, 웨이 린 또한 그제서야 여성으로서 어필하는 듯 보인다.
한편, 영국과 중국의 관계 악화를 부추기기 위해 영국 함대를 중국이 공격한 양 보이도록 몰래 미사일을 쏘려던 카버를 막기 위해 본드와 웨이 린이 애쓰던 중 웨이 린은 카버의 부하에게 붙잡혀 인질이 되는데, 영화는 본드에게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진 웨이 린을 굳이 인질로 만들면서 본드가 구해야 하는 ‘본드걸’의 이미지를 이식한다. 하지만 웨이 린은 ‘본드걸’이기 전에 뒤에 타라는 본드의 말을 무시하고, 함께 오토바이를 운전하며 뒤따라오는 빌런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첩보원이지, 그녀는 위기에 빠진 본드와 함께 탈출하기 위해 그가 보호해야 하는 여성이 아니다. 그녀는 오토바이를 몰 줄 알며 - 그것도 본드와 비견될 정도로 매우 잘 운전하며 – 빠르게 움직이는 오토바이 위에서 자유자재로 유연하게 움직이며 본드의 앞뒤를 오간다. 무엇보다 베트남에서 카버의 고층 건물을 내려가는 데 현수막을 이용한 것은 그녀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던가. (고층 건물에서 줄을 묶고 떨어지는 장면은 그녀가 주연한 <예스마담2>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기에 양자경이 <007> 시리즈에 출연함으로써 ‘본드걸’이 (섹슈얼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본드를 도와줄 수 있는, 혹은 그와 협력하는 조력자의 이미지를 획득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웨이 린의 주도성이 양자경 특유의 유연성을 필두로 하는 액션성에 기인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폴리스스토리> 이후 만들어진 아류작에 대항하기 위해 홍콩 영화계는 그녀를 ‘여형사’로 불러 내면서 <예스마담> 시리즈뿐만 아니라 그녀의 영화 커리어가 시작되었고, 홍콩 반환 직후 영국은 그녀를 전혀 만나 보지 못한 ‘본드걸’로 호명하면서 그녀는 서양 영화 시장에 진출하게 되었다. 남성 배우들의 전유물이었던 80년대 홍콩 첩보물에 등장하고, 섹슈얼한 어필이 가능한 신체를 가진 서양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던 007의 본드걸이 된 것은 양자경이라는 배우가 기존의 시장에서 바라봤을 때 익숙하지 않고 매우 낯설어서 두렵기까지 한, 즉, 본 적 없기에 발생하는 신선함과 새로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왕립무용학교 출신 댄서’였고, ‘아시아 영화계의 액션 스타’였다. 그녀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을 뿐, 단 한 번도 그녀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항상 모든 곳에서, 모든 것으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에서 비로소 그녀는 발견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베이글’을 통해 그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눈알’을 통해 이미 그녀를 보고 있다. <에에올>은 그녀를 발견한 어떤 주체가 느끼는 ‘낯섦’이 아니라, 그녀가 느끼는 혼란, 어수선함, 그리고 그것을 모두 극복해 낼 수 있는 ‘사랑’을 그녀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아시아를 필두로 한 제3세계를 바라보는 서양인들에게 ‘낯선 존재’로 발견된 캐릭터가 아니라 모든 것이 새롭고 생경한 세계에서 버티고 있는 ‘이방인’으로서 끊임없이 춤추고 있던 ‘양자경’으로, 그녀는 영화 속에 ‘있다'. 이것은 <에에올>이 이뤄낸 여러 성취들 중 하나이자, 할리우드에서 B급 감성을 뽐내던 다니엘스가 1984년부터 2023년에 이르기까지 홍콩의 액션 여배우였고 중년의 아시안 여배우인 양자경에게 바친 헌사이다.
Written by 아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