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생긴 여유로운 시간 덕분에 미술관에 갈기회가 많아졌다. 대분분은친구들이랑 함께 가지만, 어쩌다 혼자 가기도 한다.
마침남편이점심 약속이 있다고 해서나는김윤신 조각가의개인전에가기로했다. 남편은 북적거리는 미술관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남편이 약속을 잡으면 나는 그동안 눈여겨봤던 미술 전시회에 간다. 오늘은 김윤신 조각전뿐 아니라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국제갤러리>까지 느긋하게 천천히 걸어가면서 북촌로의주변 풍경도함께 즐길예정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안국역2번 출구로 나오니 오후 햇살이 눈부시게 밝다. 몇 번 간 적이 있는 <로씨니>식당이오른쪽에 보인다.다음 주에는 남편 대학 은사님이기도 한 주례선생님 내외분을 모시고 로씨니에간다. 코로나 같은 큰 변수가 없는 한, 일 년에 한 번 선생님 부부를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식당창문 위에 드리워진 초록색 차양을 올려다보았다. 입구로 들어갈 때는 보지 못했던이탈리아 식당이라는 뜻의 'Ristorante Italiano'가 쓰여 있다.길 건너<헌법재판소>앞에는한복을 입은젊은외국인남녀 한 쌍과 한가족이 걸어간다.갑자기 댕기까지 길게 늘어뜨린 한복을 차려입은 외국인 무리가 나를 앞질러 간다.
어느새<재동초등학교>담벼락이 눈앞에 있다. 이제왼쪽으로 방향을바꿔야한다. 횡단보도를 건너자작은 옷가게가 보인다. 얼마 전 모임에서 내 마음에 훅 들어온 친구가 입었던 노란색깔의 옷들이쇼윈도에 걸려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내옷은검정, 곤색이나 파스텔 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핑크, 주홍, 연두, 노랑 같은 쨍한색에끌린다. 정리해야 할옷들도 옷장에 한가득인데......들었던 노란 반팔을 슬그머니 행거에 걸어놓고 가게를 나왔다.
머리에 장식까지 얹은 한복 차림의 동남아시아 여자 둘이 한작은 미술관을 배경으로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길 건너편에도역시 동남아시아계로 보이는 여자들이 풍성한 치마와 저고리를 곱게 입고 흐드러진 분홍빛 벚꽃 나무 아래에 앉아 사진을 찍는다.가방에 넣었던 휴대폰을 다시 꺼내 사진에 담으려니 벌써 자리를 뜨고 없다. 길거리곳곳에서외국인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신기하고 흐뭇하다.
야외 카페에서는 서양 여자 두 사람이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히잡을 쓴 사람도 보인다. 여기저기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는 외국어가 뒤섞여 들린다. 마치 내가 외국에 여행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어느새 <국립현대미술관>이 왼쪽에 보이고, 길 건너앞쪽에는 <경복궁>이 있다. <국제갤러리>가 있는 오른쪽방향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건넜다. 이층 기와집 <백미당> 카페가 시선을 끈다. 카페 카운터 앞에도 외국인들이 줄 서있다. 주문한 아이스크림을 받아 한옥 밖에 비치된 벤치에 앉았다. 살랑살랑 바람 부는 나무 그늘 아래서아이스크림까지 먹으니원기가 제대로 충전되는 느낌이다.
이제 목표지인 회색 건물<국제갤러리>에 도착했다. 난간도 없는 지붕 꼭대기에서 한 여자가 거침없이걸어간다.청바지에 빨간 반팔 티를 입고 양팔을 앞뒤로 쭉쭉 뻗으며 걷는다. '지붕 위를 걷는 여자'(Woman walking on the roof)다. 광화문 흥국생명 사옥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망치질하는 거인 '해머링 맨'(Hammering man)을 제작한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작품이라고 한다.
김윤신 작가의 작품은 <국제갤러리> K1관과 K2관 두 곳에서 선보이고 있다. K1관에서는서로떨어져 있는 두 개의 방에 작품이 진열되어 있어사실상 세 곳에서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K2관은 K1관 건물 밖으로 나와 좁은 길을 따라가면 나온다.
팸플릿에 김윤신의 작품들이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의 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동일한 제목이 많아 재미 삼아 세어 보니 전시된 총 51개 작품 중에서 26개의 제목이 '합이합일 분이분일'다.작품들은 각각제작 연도와 일련번호를 뒤에붙여 구분한다.
'합이합일'은 둘이 만나 하나가 되고, '분이분일'은둘로 쪼개지면 각각 또 다른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전시장에 오기 전에 유튜브를 찾아보니 작가는오랜 시간 눈앞의 나무를 바라보다 나무와 합(合)을 이뤄 하나가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전기톱을 들어 거침없이 나무를 자른다(分).전기톱으로 단단한 나무를 자르는 90세 김윤신 작가의 힘찬모습은 마치 청년 같았다.
김윤신의 작품은수직으로 쌓아 올린 형태가 많다. 아르헨티나의 단단한 나무에 반해 그곳에서 40년간 살았지만 작품들은돌 쌓기 등 우리나라의 민간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독립투사인 오빠가 객지에서 무사하기를 기원하면서 어머니가 돌을 주워 쌓은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때 나도 돌무더기에 돌을 얹곤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돌을쌓아올린듯한김윤신의 목재 작품들을 바라보았다. 산책을 다니다 사람들이 쌓아놓은 돌무더기를발견하면주위에서 반반한돌을 찾아올려놓고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돌을 얹은 게 언제였더라? 요즘 들어 돌무더기에 돌을 얹은 기억이 없다. 나이 듦이 아쉽지만큰 일 없는 매일의 일상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고, 아이 둘 모두 결혼해서 손주 낳고열심히살고 있으니 이제는 다급하게 바라는 게 없나 보다. 다음 달에 딸아이가 둘째 출산을 앞두고 있으니 돌무더기를 만나면 오랜만에돌 하나를얹어야겠다.
김윤신 작가는 1935년 생이다. 세는 나이로 90세다. 작가보다 20년이나 어린 내 친구들과 나는몸 여기저기 탈이 나기 시작했다고 하소연하는데, 이분은 어떻게 저렇게 단단하실까? 예술에 대한 투혼과 열정이 노화를 늦추고 멈추게 하는 걸까?
90세에 전성기를 맞으셨다는 김윤신 작가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면서 작품활동을 계속하시기를 소망한다.한국 대표로 참석하는 4월부터 11월까지 열리는베니스 비엔날레에서도 반짝반짝빛나는 성과가 있으시길 빈다.
4월의 따스한 햇살과 함께 한가롭게 북촌로도거닐고김윤신 조각가의 작품도 보면서오후 한나절을행복하게 보냈다. 혼자서는 선뜻 미술관에 가게되지 않는데, 매번 약속 잡아 미술관에 가기 어려우니혼자 미술관에 가는'혼미족'이 더 자주 되어야겠다.국제갤러리 옥상에서 씩씩하게 혼자 걸어가는 여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