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로 나미에의 어머니인 에미코는 오키나와의 미군기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버지의 국적은 어디인지도 몰랐고, 다만 백인과 혼혈인 것만은 알고 있었죠. 아무로의 어머니는, 혼혈로 차별을 받고 자랐고, 이런 환경속 타계책이었는지 지역의 유지인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1977년 그렇게 오키나와에서 1남 2녀 중 막내 딸로 태어난 아무로 나미에. 아버지가 지역 유지인만큼 아무로의 앞날은 축복과 행복의 날만 가득할 줄 알았지만, 그녀가 4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는 결국 이혼을 하게 됩니다. 집안의 차이와 성격차이는 극복하기 힘들었고, 아무로의 어머니는 세 아이를 직접 키우며 가장으로서 짐을 짊어졌죠. 어쩌면 아무로 나미에의 단단함은 어머니에게서 왔나봅니다. 아무로 나미에의 어머니는 야반도주나 다름 없이 집을 나와 보육사와 스낵바를 전전하며 3명의 아이를 키워냈는데요.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 속에서 남들이 당연하게 받을 수 있는 크리스마스 선물, 생일 선물 등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점점 아무로 나미에는 조용하고, 약간은 어두운 아이로 성장합니다. 학교에서도 친구는 있었지만 결코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아이었는데, 그런 그녀의 이면은 누구보다 강한 열망이 었었죠.
아무로 나미에의 인생의 전환은 친구의 권유로 놀라갔던 오키나와 액터스 스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키나와의 연예인 양성 학교인 액터스 스쿨에 놀러간 아무로나미에는 우연히 이 학교의 교장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는 일찌감치 그녀의 가치를 알아보았습니다. 직접 버스정류장까지 쫓아와 아무로 니미에에게 특대생으로 입학할 것을 권유했고, 그녀의 사정을 알고는 학원비를 지원해줍니다. 아무로의 집에서 액터스 스쿨까지 버스비는 왕복 260엔. 주3회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해야했는데 이 돈 마저 여의치 않았던 아무로는 무려 왕복 3시간이 되는 거리를 걸어 다닙니다. 무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죠. 그렇게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액터스 스쿨을 가는 일은 이어졌고 이 때문에 어머니와의 싸움도 잦아졌습니다.
“오늘은 액터스를 쉬고, 집에 있어라”
주의를 줘도 아무로 나미에는 세탁하거나 장을 보러가는 사이 몰래 나가버렸고, 돌아오면 모른척 하기 일쑤였죠. 그렇다고 불평을 하거나 버스비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자넷 잭슨을 동경하며 가수로 성공하기를 꿈꿨고, 이는 열정으로 이어졌는데 액터스 스쿨에 푹 빠진 나머지 중학교 출석 일수가 줄어들며, 학교에서도 호출됩니다. 몰아부치는 학교의 질문에 어린 아무로는.
“중학교 졸업장이 있어도 미래에 밥 먹고 사는건 아니잖아요. 전 노래로 돈을 벌어서 살고 싶어요”
“엄마를 편하게 해드리고 싶거든요”
주 3회씩 왕복 3시간을 걸어다니며 매일 연습하고 연습했던 행동의 이면의 속뜻. 열망이 통했는지 마침내 아무로 나미에는 같은 액터스 스쿨의 친구들과 데뷔가 결정되었고, 도쿄로 상경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상경하는 날은 더 없이 화창했지만, 딸 걱정이 끝없었던 어머니는 가지말라고 가방을 끌어 당겼고, 아무로의 눈에는 눈물이 넘쳐났습니다. 실랑이를 벌이던 중
“무조건 성공할 테니까”
어머니는 손에서 힘이 빠져버렸고 결국 움켜줬던 가방끈을 놓아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92년, 아무로 나미에는 오키나와 액터즈스쿨의 첫 야심작이었던 슈퍼몽키즈의 멤버로 연예계에 데뷔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일본 연예계는 만만치 않았고, 슈퍼몽키즈는 고전합니다. 당시 아무로 나미에는 신문의 TV란에도 나오지 않는 방송의 조연으로 출연하며 전전했습니다.
처음 레귤러로 '펑키키즈'라는 아침 프로그램 출연이 결정되었는데, 이 프로에서는 토끼 인형을 입고 춤을 추곤 했습니다. 연예계의 밑바닥 시절을 보내고 있던 시절 종종 집에 돌아오면 휴식을 취하며 마음이 편해질 법도 했지만 오히려 집에서는 과묵해졌고, 어머니와의 대화도 뜸해졌는데, 오히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그녀의 성격 때문이었죠.
당시 아무로 나미에는 어머니와 딱 3년만 해보고 안되면 다시 돌아오기로 약속한 상태였습니다.
“그때의 우리는 그런 관계였어요” -아무로 어머니 -
그러던 중 소속사는 승부수를 띄웁니다. 바로 슈퍼몽키즈에서 가장 뛰어났던 아무로나미에를 단독으로 내세우기 시작했고, 레이블을 바꿨는데, 그것이 바로 body feel exit'
이 당시 거물 프로듀서로 떠오르고 있던 코무로 테츠야는 유로비트 음악에 빠져 여러 곡들을 만들었는데,
아무로에게 전달된 이곡의 비트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춤추는 아무로의 스타일과 어우러졌습니다.
마치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듯 이후 인기는 더욱 높아져서 일본 전체에 '아무라 현상(아무로나미에를 따라하는 현상)'이란 말이 나올정도로 그녀는 인기를 끌었고, 1996년 마침내 'Don't wanna cry'로 아무로 나미에는 레코드 대상을 수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무로는 좀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는 강한 아이였고, 하물며 사람들 앞에서 는 절대 울지 않았는데,레코드 대상 수상하고 대중의 앞에서 우는 모습에 어머니도 말로 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는데, 그 순간 어머니의 머릿속에선 우유를 마시지 않던 아기시절, 가난의 구렁텅이 빠져 주눅들던 시절, 액터스 시절, 무엇보다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보스턴 백 하나로 집을 뛰쳐나간 딸의 뒷모습 등 여러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어머니는 “3년이면 딸이 돌아올 것이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로 나미에는 “3년 후 성공한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여드리는게 목표였고, 그 실현이 바로 레코드 대상 수상의 순간이었던 것 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변화가 찾아옵니다. 아무로 나미에가 자리를 잡고 본토에서 연예인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스낵바를 운영하고 있었는데요...
-다음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