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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emata mathemata Jul 31. 2024

부르지마

프롤로그

나는 설립된 지 반세기 정도 지난 낡은 연수원의 기숙사 방에 홀로 누워 있다. 초여름의 더위는 밤중에는 사그라들었다. 달뜬 신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이 한낮의 열기를 조심히 뱉어내는 건물을 감싸고 있다.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한때 자유로웠다. 이제는 가끔 회사 연수가 있을 때만 혼자만의 시간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하여 허투로 버리고 싶지 않다.


더위가 곳곳을 찾아 달구는 몇 시간 전 점심 시간이 떠올랐다. 연수원에서 오랫만에 만난 회사 선배 김정수와 몇 년 만에 식사를 같이 했다. 구내식당의 백반이 얼마만인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와 나는 3살 차이 정도이다. 이미 그의 머리는 반백에 가까웠다. 몇 년 지나지 않으면 나 역시 노안과 백발이 틀림없이 찾아올 것이다. 생각해보니 며칠 전 불길한 징조도 있었다. 면도를 하는데 갑자기 흰 색 턱수염 한 올이 신경을 거스르게 했다. 면도를 해서 사라졌지만 다시 내게 인사할 것이다.


"와이프는 잘 있고?" 정수의 호구조사가 시작된다.

"회사 그만 뒀어요." 나는 식후 정수가 산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회사였는데?"

"공무원이었어요."

"좋은 직장인데 왜 그만두지?"


정수의 호구조사가 계속된다. 그는 커피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술도 커피도 안 마시면 무슨 재미로 사세요?"

"응, 대신 과자를 많이 먹어."

"살이 많이 빠지셔네요."


정수는 반백에 얼굴살이 빠져 한층 더 수척해 보였다. 나는 내 미래가 와서 이야기하는 것 같아 마음이 심란해졌다.

밤중에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일기장을 폈다. "오늘 날씨 맑음. 끝"이라고 쓰면 좋으련만 한 줄도 써지지 않았다.

시간이 더 흐르니 창밖의 새소리가 들린다. 연수원 주변의 우거진 조경수들이 어둠 속에 잠들어 있다. 나는 2인실 숙소에 홀로 누워 낡은 베게와 침대가 주는 고색창연함이 더해져 무언가 심란한 마음을 추스릴 수 없었다.


나는 원래 과거를 반추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과거의 삶이 떠올랐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과거의 인연은 잊고 살았다. 그런데 산사에서 템플스테이 하듯이 산비둘기 소리가 그칠 줄 모른다. 게다가 간간히 들리는 한밤중 엑셀에 잔뜩 힘을 주고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운전자가 모는 차 지나가는 소리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이 불협화음 덕분인지 몰라도 나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다시 일기장에 무언가 적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볼펜을 들고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당시 나는 지방 국립대를 다니는 대학생이었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수줍음이 많았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외모가 평범한 탓이 컸다. 게다가 학과 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아 친구도 별로 사귀지 못했다.


이런 경우에 이성을 만나는 길은 뻔하다. 이제는 오픈챗이나 스마트폰 데이팅app이 이 기능을 대체했겠지만 당시에는 인터넷으로 채팅을 했다.

약속장소를 정해 만나기로 한 임민영은 나이 차이가 5살 정도 났던 것 같다. 술을 좋아한다고 해서 주점에서 저녁을 겸하기로 하고 만났다. 겨울이었다. 옛날 노래가 흘러나오는 민속주점에서 만났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 하시나요?" 그땐 내가 지금처럼 속물같이 보이진 않았을 것 같다.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지방신문 기자 일을 하고 있어." 그녀는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얼굴은 새하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였다. 키는 중간에 체형은 날씬하고 전체적으로 도회적인 이미지였다.

"서울대 졸업하셨다면서요?" 그 당시에 나는 지방대 출신 특유의 선망을 담아 그녀를 약간 경외롭게 바라본 것 같다. 거기에 더해 서울대 출신 지성과 미모를 겸비했는데 왠지 모를 사건 혹은 신념 때문에 재능을 낭비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응, 불어불문학 전공했지." 민영은 짧게 답하고 담배를 피었다. 나는 비흡연자라 맞담배를 피진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그땐 주점 뿐만 아니라 PC방도 흡연이 가능했다. 어렸을 때 담배피는 여자는 묘하게 섹시함을 주었다. 무언가를 연상하게 하는 건지 몰라도.

"좋아하는 노래 있어요?" 담배의 잔향을 느끼며 그녀에게 물었다. 뭔가 오늘 밤이 깊어지면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기대했을까?

"부르지마, 김목경이라는 가수가 있어."


"처음 듣는데요?" 그땐 스트리밍 서비스란게 대중화되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일단 옛 노래 좋아하는 가게 주인이 대화를 엿듣고 센스 있게 재생했으리라. 그땐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부르지마 부르지마 옛노래를 하고픈 말이 있어도

  부르지마 부르지마 옛사랑을 추억은 남아있잖아


지금 생각나서 그 노래를 다시 들어보니 확실히 20대 감성은 아니지만 30대부터는 느낄 수 있는 애수가 있다. 기억 속 그녀는 나이를 먹지 않아 이제는 숨길 수 없이 구석구석 아저씨가 된 나보다 어리다. 우리는 기억 속에서 영원할 수 있다.


"나 누나가 좋아요." 술을 임계점 넘게 마셔 느닷없이 나는 고백공격을 해버렸다. 불과 처음 만난 사이인데다 나는 치명적 매력도 없는데 말이다.

"갑자기 왜 고백을 하고 그래."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데 화내거나 그러진 않고 나를 어른것 같다.

"그래 오늘 누나 재밌었는데 놀아줘서 고마웠어."

난 지금도 그렇지만 질척대는 스타일이 아니다. 쓸데없이 자존심이 강해서 먼저 도망친다. 사실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고백도 한 적이 거의 없다. 이건 정말 예외적인 상황인 것이다.

"왜 벌써 과거형으로 이야기를 말해?"


난 그때 민영이 했던 이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마 그 날 이후에도 과거형으로 말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렇게 지적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아니면 실시간으로 인간관계를 정리한 적이 없었던 것이 맞다고 봐야 한다. 대부분 타자와의 관계는 요란한 이별선언 없이 조용히 정리된다.

나는 민영과 완전히 연락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간간히 문자로 안부 정도 주고받다가 수 년이 흘러 내가 취업을 하고 사회초년생이 되어 그녀와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그런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부모님 집에서 회사로 출퇴근하던 시절이었다. 내 나이는 갓 서른 살이었다. 민영 누나가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지금 와서 그녀가 쓴 책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여전히 판매 중인 책이다. 그녀 혹은 작가의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니 그녀의 운동권 경력과 관련 있는 책을 한 권 더 출판했다. 이후의 책은 제목으로 미루어 보면 전작에 비해 흥행에 성공한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책 한 권이라도 출판하는 게 소원인 나로서는 부러울 따름이었다.


민영은 당시 기자라는 글 쓰는 전문 직업을 가졌지만 아마도 첫 책을 출간해서 작가라는 타이틀을 획득하여 뿌듯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가로의 앞날을 축하하기 위해 수 년 만에 만나기로 했다. 나는 대학생과 취업 준비생 시절을 거쳐 직업을 갖게 되어 조금 당당해졌다. 그 시기에 나는 가장 자신만만했다.


그녀는 지금의 여성 팬들의 응원 열기와 달리 당시 여자로서는 흔하지 않은 야구 팬이었던 것 같다. 어느 가을 날이었다. 지금은 바로 옆에 신축 야구장이 늠름하게 버티고 서 있지만 당시에는 지어진 지 반세기는 흘렀을 잿빛 야구장이 전부였다. 오래된 경기장에는 그만큼 커다랗고 오래된 나무들이 빼곡히 서 있어 가을의 출현을 알리고 있었다. 경기장 입구에서 민영을 만나 야구장에 같이 들어갔다. 연인은 아니었지만 남녀 사이의 재회 치고는 조금 독특한 장소인 것 같다. 지역 연고지 구단의 홈 구장이었지만 지금처럼 야구장 관객이 떠들썩하지 않았다. 야구장의 장점은 지금이나 그때나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영은 술을 좋아했다.

자리에 앉아 경기장 내 편의점에서 산 맥주를 샀다. 맥주가 담긴 캔을 따는 소리가 경쾌했고 마침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오랜 친구를 만나니 더 없이 좋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이네. 누나는 그대로구나."

민영은 세월이 흘러 30대 중반이었으나 거의 그대로의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금 창백한 느낌이 드는 것 외에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화장을 옅게 하고 청바지와 카디건을 입고 온 수수한 차림새였다. 머리는 묶어 뒤로 넘기고 한 가닥 앞에 남겼다.

"별 소리를 다하네."

그녀는 마치 어제 헤어지고 오늘 본 듯한 말로 나를 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각일지 모르나 마지막 만남과 달리 뭔가 호의적인 혹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였다.

"작가님, 책 반응은 어때?"

"응, 생각보다 많이 팔렸지."

"와, 대단한데? 얼마나 팔렸는데?"

"1만 부 이상은 나간 듯 해."


그때는 출산율보다 빨리 독서 인구가 소멸 중인 우리나라에서 책을 1만 부 판매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약간 갸우뚱한 표정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뭐하고 지내는데? 아직도 지역신문 기자하고 있어?"

나는 실수로 '아직도'라는 표현을 써버렸다. 아마 그녀가 훨씬 나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응, 지금은 시청 홍보실에 계약직 공무원으로 들어왔어."

비록 계약직이긴 하지만 공무원이라니 그녀의 현재 위치가 믿겨지지 않았다. 운동권 출신 기자가 공무원이라는 붕어빵 틀 같은 관료제에 적응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과거의 직업인 기자와 현재의 글쓰기와 연관성 있는 홍보실이라는 부서의 업무에 만족하는 듯 했다.

"아, 시청이면 우리 회사와 사무실 위치가 가깝네. 정말 잘 되었어."


그녀는 웃었으나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때 기분은 이유를 알 수 없이 뭔가 쓸쓸했다. 뭔가 다시 그녀를 못 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 야구를 본 것은 분명한데 그 날의 경기가 홈 팀이 이겼는지, 졌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을 반추해 보니 아마 8회 쯤 승패가 거의 분명히 갈렸지만 여전히 9회를 남긴 상황에서 자리를 옮긴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야구장에 가면 9회 말의 순간까지 버티질 못했다. 나가는 사람들이 가득 찬 출구에서 부대끼는 것이 걱정되어 절정의 순간을 놓치는 것이다. 야구 뿐만 아니라 내 모든 순간이 그와 같지 않았을까 싶어 두렵기까지 하다.


야구장의 함성을 벗어나 우리는 걸어서 야(夜)시장에 갔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우후죽순으로 만들어 내는 이벤트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처음 가 보는 시장의 밤 풍경은 꽤 이국적인 느낌의 매력이 있었다.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 곳곳에 있었다. 밤이 되면 너른 술판이 깔리는 종로3가 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게에 들어가거나 혹은 노점에서 파는 술을 들고 다니며 마셨다. 왠지 나는 오늘 새벽까지 술을 마시게 되면 그녀와 분명 사귈 수는 없겠지만 자게 될 것 같았다. 민영의 눈빛이 반짝였고 둘 사이의 거리는 분명 좁혀졌다. 처음 그녀와 만났을 때와 달리 나는 여자를 많이 경험한 상태였다.


그런데 술집을 정해 들어가려는 찰나 불현듯 핸드폰에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두어 번 정도 만남을 했던 여자였다. 순간 나는 판단해야 했다. 앞으로 안정적인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여자를 만날지 혹은 민영과의 강렬한 만남을 경험할지 말이다.


"누나, 나 지금 가봐야겠어. 내가 갑자기 일이 좀 생겼네."

그때 그녀의 표정은 정말 교통사고의 목격자처럼 놀랍고도 한편으로 무척 아쉬워 보였다. 사실은 무례함을 제일 많이 느끼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당시에 예의에 대해 잘 몰랐기에 오만한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녀를 집에 바래다 준 것도 아니고 전화를 받기 위해 야시장에서 그냥 가버렸다.

이후 나는 무책임한 태도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기 보다는 그 날의 원나잇 스탠드의 기회에 아쉬움만 가졌을 뿐이다.

며칠 뒤 나는 미안함에 문자를 보냈다.


"그날 잘 들어갔어? 자랑만 하지 말고 책 좀 보내주지 그래?"

민영이 답장했다.

"누나랑 자면 책 보내 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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