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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방문

- 장일호 지음



인생의 예기치 않은 사건 앞에서
책 속의 말들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고도
다시 책 앞에선 사람의 이야기





참으로 묘한 에세이이다.


이것은 개인적 체험을 적은 글인가?

이것은 한국적 현실에 대해 삐딱하게 적은 글인가? 

이것은 저자 자신의 독서 이력을 뽐내기 위한 글인가?


어느 하나를 택하여 적어도 한 권의 책이 될 만한 보편적 소재들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를 몽땅 한 바가니 안에 넣고 뒤흔든다면 어떤 책이 나올까?


아주 뛰어난 문장의 연금술사가 아니면 대체로 뒤죽박죽된 작품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혹은 UFO형 에세이가 되거나 불행하게도 무색무취의 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 체험과 사회문제, 책 등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독자들의 무릎을 탁치게 만드는 에세이를 만든다면 독자는 일석삼조의 효용성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깐 내밀한 고백, 사회 비판, 도서소개 등의 세 가지 즐거움말이다.이것은 마치 뛰어난 목공이 나무와 나무를 서로 물고 물리며 단단한 이음새를 만들면서 집을 올리는 것과 같다. 그야말로 아무런 흠집이나 못질도 없는 천의무봉의 산문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장일호 기자의 첫 에세이 슬픔의 방문


시사인 장일호 기자의 ‘슬픔의 방문’은 이 세 가지 삼박자를 모두 갖춘 에세이이다.

가볍거나 무겁지 않고 고양이 무게만큼의 적당한 묵직함을 가진 이 산문은 결국 책에 대한 이야기로 끝난다.


작가는 ‘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고 하며 ‘행간을 서성이며 배운 것들 덕분에 반드시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 앞으로를 기대한다‘며 책에 대한 예찬을 펼친다. 우리는 책으로 가는 길이 좀처럼 보이지 않지만 초반전에는 내밀한 고백을 들으며 문장을 탐색을 하다가 어떨 때는 연민과 동정을, 어떨 때는 통쾌하게 웃기도 한다. 그러다가 중반전으로 넘어 가면 한국 사회의 문제점들로 일대 확장되면서 눈이 번쩍 뜨이고 후반전에 가면 이와 관련된 책들이 빗장을 열고 나타나면서 독자들을 낚아챈다.


8살 무렵, 아버지의 자살과 초등학생 때 당한 성폭력, 편모 슬하와 지하셋방에서의 가난. 그 가난 때문에 상업계 고등학교를 다녀야만 했던 장일호 기자. 그리고 갑작스러운 유방암의 발병과 지루한 투병생활. 그녀는 지극한 슬픔이 방문했을 때 항상 책의 행간에서 위로를 받고 자신의 길을 찾았다고 한다.


가난과 질병, 가족과 사랑, 장애와 노동, 돌봄과 죽음, 술과 고양이, 어느 아이돌 가수의 자살 등 그녀와 함께 해온 생의 슬픔과 환희를 숨김과 부끄러움 없이 지면에 서서히 노출하고 있다. 그리고 점차 공감의 수위를 천천히 높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행간에 서성이며 배운 것들을 꺼낸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외할머니는 중환자실에서 200밀리미터 요거트를 빨대로 드시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있는 작가는 외할머니에게서 강한 생의 욕망을 느낀다. 가족들은 그저 숨만 붙어 있어도 좋겠다는 욕구를 드러내지만 작가는 그런 삶을 지배하는 생의 무용함과 생의 환희가 망각된 육신을 생각하며 고민에 빠진다.


죽어가는 자들의 연명치료가 그 어떤 의미가 있을지 작가는 상념에 빠진다. 독자들도 덩달아 무념무상에 빠져 있을 때 작가는 인용문과 책을 동시에 꺼집어 낸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 이라며 슬며시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는 책을 우리들에게 내민다. 어찌할 것인가? 당신이라면 꼼짝없이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항상 패배자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약하다’는 장일호 작가는 자살자 가족과 지독한 가난, 성폭력 생존자, 상업계고 출신, 암 환자라는 주변부적 삶에서 슬픔의 힘을 키워왔다.


작가는 슬픔이 자신을 방문할 때마다 화단이 있는 뒷문으로 조용히 나가 새로운 생의 의지를 얻기 위해 책을 탐색하는 여행을 했다고 한다. ‘슬픔의 방문’ 에는 책 속에서 찾아 낸 60여 개의 문장이 인용돼 있고 51권의 책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사인 기자답게 일간지 1면을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8명의 삶을 다른 작가들과 함께 연재하고 싶다는 장일호 작가. 그의 두 번째 책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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