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수연 지음
멀리 떠날 것. 그리고 돌아올 것. 힘껏 돌아올 것.
그것은 오래되고 익숙한 리셋의 방식이었다.
B 작가님께.
보내주신 첫 번째 산문집 ‘나는 바다를 닮아서‘ 잘 읽어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잘 지내고 계신가요?
천안 이곳은 며칠째 낮게 내려앉은 하늘에서 뿌연 포말을 토하고 있습니다. 대기는 녹이 슬고 낡아서 태양은 이미 빛을 잃었으며 먼 산은 일그러진 모습으로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계시는 곳은 빛과 나무가 어우러진 깊은 숲이 있고 파란 하늘과 맑은 호수가 맞물린 공중은 날개 없는 여우도 날아오를 만큼 쾌청한 날씨겠지요.
아름다운 그곳에서 새로운 소설에 몰두 중인 선생님의 뒷모습이 보이는듯 합니다. 혹시 이 편지도 앨렌이 있는 kaffina 카페에서 읽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새로운 산문집을 두 번 읽었지만 아직도 서호시장 골목길에서 아홉 살 어린 소녀의 앙칼진 목소리와 서늘한 슬픔이 전해지는 듯합니다. 그리고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팔리지 않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난감한 미소로 말을 건네던 땡큐와 바이 소리가 귓전에서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밴쿠버에서 ‘완벽한 익명’으로 새롭게 살고 싶었던 선생님. 그러나 그곳에서도 가난의 밥벌이는 여전히 이어졌고 때로는 초기 이민자들이 느끼는 수치와 모멸감으로 밤의 끝에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낯선 이국의 땅에서 숨 쉬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선생님의 고립감을 생각하면 마치 저의 낯을 강물 속에 담근 것처럼 그 어떤 답답함이 몰려왔습니다.
선생님, 그럴 때마다 혹시 다시 통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셨나요? 늙은 엄마와 꼽추 처녀가 한복을 짓고 아기동자가 점집을 하던 그곳 서호 시장 이층 말이에요. 때론 ‘청포도’와 ‘은하옥’ 사이에 있었던 엄마의 선술집도 생각나지 않으셨나요? 오랫동안 바다 밖의 삶을 갈망하셨지만 수구초심이란 마음은 쉽게 버릴 수 없는 그리움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찰스 디킨스는 ‘고향은 마법사가 외는 어떤 주문보다도 혹은 영혼이 응하는 어떤 주술보다 강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노출과 관음이 일상화된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겠죠. 아홉 살 몽실머리 소녀였던 통영은 구슬하나 감출 수 없었던 유리상자였고 짧은 호흡소리마저 물구나무를 선 박쥐들이 몰래 엿듣던 곳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대놓고 거칠었고 어른들은 교묘하게 난폭했던 그곳’ 말이죠.
어머니의 고단한 생이 봄날 쑥 내음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곳으로 되돌아가기란 쉽지 않았겠죠.
그리고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어린 딸을 위해 하얀 설탕을 뿌려주시던 붕어빵의 그 달콤함도 남아 있잖아요. 저는 그 이야기를 읽어을 때 저의 아버지가 생각나더군요. 남동생을 장가보낸 후 고향으로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나무 숟가락과 함께 건네주시던 요플레 한 통. 아버지는 그 당시 말기암이었고 그것은 제게 주신 마지막 음식이었죠.
정말 통영이라는 그곳이 선생님의 선택과 무관한 우연의 땅이었다면 밴쿠버는 벗어나고 달아나고 싶어 찾아간 필연의 땅이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린 날, 통영 구름다리의 난간을 잡고 위험한 곡예를 부리며 걸었듯이 낡고 허물어진 시장 골목길을 벗어나 다소 위험한 이주일지라도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겠죠.
그래서 선생님은 바다를 닮아, 바다를 벗어날 수 없어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새로운 정주지를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초기 이민자들의 삶은 주변부의 삶이자 소수자의 삶이었으며 매일매일 설움과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었죠.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쏘리쏘리하며 허리를 굽혀야 했고 밥공기와 수저마저 빌려 써야 했던 가난, 그리고 식당에서 밥도 제대로 주문하지 못했던 그 시절.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해야 할 때 그 삶의 아득함을 무엇으로 달래야 했을까요?
그래서 선생님은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 올 때 밤을 새워가며 미서부 해안선을 따라 캘리포니아 남단까지 달리곤 하셨죠.
‘멀리 떠날 것. 그리고 돌아올 것. 힘껏 돌아올 것’ 이것은 삶이 막막해질 때마다 시행한 오래되고 익숙한 선생님만의 리셋 방식이었습니다.
이제는 사랑보다 연민이 앞선다는 남편의 선한 마음과 대수술에도 불구하고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던 따님의 인내와 낙천성은 선생님의 지친 발등에 환하게 비추는 반딧불이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내리는 빗속에서도 춤추는 일이다’ 는 낙관주의는 깊은 고통과 질긴 인내에서만 얻을 수 있는 삶의 태도일 것입니다.
점차 선생님의 삶들이 조금씩 '어중간한 이해와 오해의 상태에 익숙해’ 지면서 점점 부유하던 삶도 정주의 삶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어쩌면 육신의 살을 내어주고 안정된 삶을 보장받아야만 했던 기나긴 신산의 시간들이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의 공기들이 스며든 병든 쓸개를 떼어 내어야 했고 결혼반지를 낀 남편의 손가락을 잃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통영.
아홉 살 소녀가 통영을 떠나고자 했을 때 아버지의 죽음이 있었다면 이민 이십여 년만에 다시 통영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때 먼바다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선생님은 길 없는 길을 침묵으로 걸으며 49년을 홀로 살아온 어머니의 생을 생각하셨습니다.
시인 김사인은 ‘통영’에서 ’몸 안쪽 어디선가 씨릉씨릉 여치 같은 것이 하나 자꾸만 우는 저녁바다‘ 라는 말로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었습니다. 선생님의 슬픔도 그러했겠죠.
선생님의 첫 번째 산문집 ‘나는 바다를 닮아서’에 수록된 27편의 짧은 이야기들은 밤바다의 달빛을 받은 윤슬처럼 반짝거리며 저의 마음 깊은 곳으로 밀려들어왔습니다.
선생님의 ‘가난과 황폐와 미숙’ 했던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견디며 자신을 드러낸 고백은 저를 포함해서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르는 이야기를 쓸 수 없다‘는 선생님의 오랜 고집이 일구어낸 결과이며 그래서 이 산문집은 다정한 슬픔에 대한 선생님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을 모두 읽고 나니 비로소 소설 ‘통영’ 이 더욱 환하게 밝아왔고 선생님의 삶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 바다의 존재가 작가 반수연과 소설 통영의 탄생 이유이듯이 선생님은 천생 바다를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앨렌이 있는 그 카페에서 새로운 소설이 탄생되길 기대해 보며 다시 만나 뵐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