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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세상의 기쁜 말

- 정혜윤 지음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당신을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단어를 말해 달라.

세속적인 가치로 치장된 당신의 낡은 갑옷을 벗고 보랏빛이 도는 생살의 아름다움을 보여 달라. 그것은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 속에 담긴 영롱한 보석과 같은 것이다. 때로는 기쁨, 가끔은 슬픔. 아름다움과 추함이 범벅이 된 삶의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내려라. 그러면 두음절 또는 세음절의 단어가 빛을 내며 밝은 곳으로 얼굴을 내밀 것이다.


생을 산다는 것은 당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창조의 시간이다. 우연과 필연, 의지와 행운이 수시로 자리를 바꾸며 생의 거미집을 짓는다. 그 집에서 별과 달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나무와 빛을 보며 웃음을 짓는다. 당신과 나, 우리는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은 생을 살고 있으며 우리의 희극적 바람과 달리 세상은 온통 비극적 사막이다.


하지만 슬픔의 세상에서 기쁨의 언어를 찾아낼 수 있다면 생은 조금 견딜만하지 않을까?


마술적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정혜윤 PD의 에세이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은 그녀가 도처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 속의 문장을 인용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의 작가 정혜윤


작가는 ’ 언어가 우리를 구해줄 수 있다는 믿음’과 ‘새로운 말,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 곳에서 새로운 사람이 태어난다’는 믿음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을 찾아 길을 떠난다.


남쪽바다에서 자신을 자유라고 부르는 어부를 만난다. 고아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어부의 지혜는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처럼 환하다. 뒤늦게 자신과 똑같이 물고기의 눈을 볼 줄 아는 여자를 30년 만에 만나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이야기는 눈물이 날 정도로 신비롭고 아름답다. 그 남자의 단어는 자유, 약속, 품위였다.


그리고 두 명의 자폐아를 둔 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있다. 하나가 아닌 장애인 둘을 둔 삶은 보통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상상이상의 고달픔이다. 그러나 그는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다. 그의 신산한 삶에 유일한 기쁨을 주는 것은 물고기가 찌를 무는 눈맛을 느끼는 것이다.


삶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우리를 견디게 하는 것은 작은 일에서 빛을 발견하고 소소한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그 기쁨을 발견하는 찰나의눈맛을 자주 느낄 때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생을 이어간다.


그리고 ’무게제로‘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가 타인의 보이지 않는 삶의 무게를 생각할 때 우리는 조화로운 사람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 사이의 균형과 조화란게 서로의 무게를 알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눈맛‘, ’무게제로‘의 단어로 자신의 존재를 부여한다.


간월도가 있는 바다 갯벌에는 학처럼 허리를 굽혀 굴을 따는 아낙네의 노동이 있다. 지구와 달의 사랑으로 탄생한 갯벌에서 인간은 생명을 이어간다. 거대한 우주의 수레바퀴에서 인간은 보이지 않을 정도의 고양이 털에 불과하다.


아낙네들은 갯벌에서 자신의 몸이 늙어가고 허리가 반으로 접혀 땅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어린 소녀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달은 외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아낙네들은 자신의 삶을 지켜 본 달을 보며 자신의 운명을 생각했으며 고단한 노동을 달랬다.

아낙네들은 ‘최고의 행복은 자신의 몸을 놀려 일하고 자기 손으로 뭔가를 생산하는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자기 세계를 가꾸어 간다. 그때마다 ‘달’이라는 단어가 꽃을 피웠다.


달의 새 ‘문버드’는 일 년에 두 번 월동지를 찾아 14,000km를 비행한다. 그 거리가 달의 분화구까지 날아가 지구의 절반 거리까지 되돌아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작은 새는 단 한 번도 날갯짓을 쉬지 않고 8일 동안, 8천 킬로미터를 날아가는 강인함을 갖고 있다. 비바람과 폭풍우, 높은 산맥의 장벽에도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반드시 가고야 마는 문버드의 또 다른 이름은 ‘B95’이다.


남쪽과 서쪽 바다의 평범한 현인들을 찾아 이정표 없는 길을 떠났던 작가는 제주에서 강장군 할머니를 만난다. 젊을 때 금광으로 큰돈을 벌고 그 돈을 사기 당해 제주 바다에 풍덩 몸을 던져 죽으려 했던 할머니. 그녀는 다시 귤 중개업으로 기사회생했다.


‘여지껏 그냥 나이만 먹은 거 아냐’라는 자탄으로 78세에 노인 대학에 들어간 할머니는 귀가 배지근할 정도로 어떤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고 한다.


‘내가 지금 듣는 것은 다시는 못 듣겠지. 다시는 이야기도 못 나누겠지’라는 절실한 마음으로 두 귀를 열고 타인의 이야기에 몰입한다.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의 내면은 점점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진다고 한다. 할머니의 단어는 ’ 배지근하다 ‘였다.


다시 작가는 사회적 참사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이 겪은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픈 이야기에 공감하며 연대의 손을 내민다. 2003년 2월 대구 지하철참사에서 맏딸을 잃은 황명애 씨는 깊은 눈물을 거두고 오랜 침묵을 깬 후 둥근 노란 해바라기처럼 빛을 향해 고개를 든다. 그리고 슬픔에 빠진 타인들에게 ‘하쿠나마타타, 다 잘될 거야’라는 희망을 전한다. ‘하쿠나마타타’는 ‘슬픔과 아픔이 경이롭게 변한 말’이다. 황명애씨의 단어는 ’하쿠나마타타‘였다.


그리고 세월호와 9.11의 유리창을 통해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들려준다. 두 개의 창은 모두 죽음으로  연결되지만 세월호의 창은 어린 생명을 가둔 ‘저주의 창’이며 9.11의 창은 ‘회복력과 희망의 상징’이다. 타워의 4만 장의 유리창 중에서 유일하게 깨지지 않은창이였다.


세월호에서 아들을 잃은 최경덕 씨는 단 한 번도 외국으로 나가지 못한 아들의 여권을 들고 9.11 메모리얼 파크를 찾는다. 엄청난 충격 속에서 깨지지 않은 유리창을 보며 살아갈 희망을 읽는다. 세월호와 9.11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단어는 ’ 유리창‘이다.


그리고 ‘목소리’, ‘이름’, ‘우리 인생의 전문가’라는 단어는 1999년 미국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단어이다. 그들이 겪은 고통은 다른 사람과 연결될 때 치유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때서야 우리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과 함께 울릴 때 세상의 변화는 찾아온다.마거릿 애트우드의 ‘우리가 가진 것은 목소리뿐’는 말처럼 부당한 현실에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레벨스 프로젝트’라는 ‘삶을 위한 행진’을 시작한다. 또 다른 총기 피해자들을 만나 그들이 경험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이 먼저 겪은 참사의 경험을 그들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들이 인생의 전문가이다.

우리가 ‘연대’라는 이름으로 서로 만날 때 슬픔은 우리 안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새로운 변화를 꿈꾸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목소리로 무슨 변화를 만들었는가라고 말이다.


그리고 또 묻는다.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이냐고. 나와 당신께 묻는다.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살아온 생은 허무의 모래탑에 불과하며

앞으로 살아갈 생도 허무가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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